"제록스 복사기가 깨끗한 내 성적표 열 부를 뱉어냈다. 제시의 빈 진학상담 교사 사무실에 앉아, 나는 손끝으로 점수가 채워진 칸들을 훑어 내려갔다. 92점, 94점, 100점, 100점, 98점. 학기당 총 열 개의 수업을 수강해서, 대부분이 A학점이었다. 계획대로 나는 한 학기에 한 학년 분을 마쳤다."(447쪽)
이는 리즈 머리의 <길위에서 하버드까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약을 즐겨하는 엄마와 아빠 밑에서, 술 중독과 정신병동을 오가며 에이즈에 걸린 엄마 밑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가, 힘겹게 JFK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 결과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죠.
모름지기 머리가 좋은 학생이라면 그 정도 학점은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부모가 자식 뒷바라지를 맘껏 해 준다면 그 역시 가능할 수 있는 점수라 생각하겠죠? 더욱이 먹을 것을 제대로 먹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가능할 일이라 생각하겠죠?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코카인과 마약을 즐겨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죠. 숱한 날 동안 부부 싸움을 하는 부모의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봐야 했고, 폭력과 이혼 위기도 수없이 목격해야 했죠. 뿐만 아니라 에이즈에 걸린 엄마로부터 격리되어 보호시설에 감금돼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학교생활에 적응치 못하고, 퇴학당할 뻔한 위기를 숱하게 겪었던 것도 그런 모진 환경 때문이었죠.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던 걸까요?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 같았습니다.
문제는 고등학교 진학이었습니다. 엄마도 이미 딴 살림을 차리고 있었고, 아빠도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여서, 고등학교 입학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 온 암울한 터널을 독특한 지혜로 뚫고 나갔고, 급기야 JFK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죠.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찾아 온 '빛의 각성'으로 인해 이제껏 살아 온 거리의 탕아와는 달리 온전히 공부에 매진하게 되죠. 하지만 노숙자 처지로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교과서도 가벼울 리 없고, 과제물을 내기 위해 뒤져야 할 자료집들도 무시할 수 없고, 그걸 친구들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빛의 각성'을 끝까지 인내하며 이어나갑니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151쪽)이는 익명의 마약중독자(NA)모임의 사람들이 주님께 고백하던 기도문입니다. 그녀의 나이 12살 때 엄마의 손에 붙잡혀 따라나가서 듣게 된 고백이죠. 그 기도는 '모든 단계를 통과'하여 '마약을 물리침'으로써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고백이기도 했죠.
어찌 보면 그 기도문이 JFK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해야겠다는 '각성의 빛'으로 다가온 것이었고, 그 고백문이 <뉴욕타임즈>의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 대학에 다니게 된 '원동력'이 되었고, 그 기도문이 전 세계 최고의 CEO 700여 명으로 구성된 청중 앞에서 강연한 달라이 라마의 기조연설 다음 발표자로 그녀가 연단에 선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뉴욕타임즈>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면접하던 그날. 최종 6명이 참여한 면접 자리에서, 다른 모든 친구들은 부모의 지지와 격려를 받으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홀로였죠. 그녀에겐 미리 짜 놓은 각본도, 그 면접관들을 이해시킬 만한 전략도 없었죠. 다만 그녀가 살아 온 노숙자 인생 여정이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죠.
그것이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유이지 않을까요?
"노숙자건 사업가건, 의사건, 교사건, 어떤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건,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진실이 적용된다. 삶은 본인이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진실."(4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