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알베르게 숙소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계란볶음밥을 요리하고 있는 착한 남자 헬리오스.
 알베르게 숙소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계란볶음밥을 요리하고 있는 착한 남자 헬리오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헬리오스 혼자 주방에서 바삐 움직인다. 순례자의 아침은 간단한 시리얼이나 빵 그리고 차와 커피 등이 일반적이다. 순례자들을 위하겠다는 그의 헌신적인 마음가짐 덕분에 다들 아침부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는 계란볶음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카미노를 걷는 내내 순례자들은 아낌없는 베푸는 풍성한 기쁨을 체득하고 있다. 받는 이들도 함박 웃음이지만 헬리오스의 표정은 천사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문군은 오늘도 아침 일찍 문을 나선다. 전날 밤늦게 만난 페르민(Permin)은 그의 개 코난을 데리고 순례 중이다. 카미노에서 개를 데리고 도보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여러 번 봐온 터라 생소하진 않다. 다만 그의 여행 동기가 조금 독특할 뿐이다.

가족 두고 나선 순례길, 이상할 거 없습니다

기타를 매고 코난과 동행하는 순례자 페르민. 카미노 프랑스부터 포르투갈로 이어지는 긴 도보여행 중이다.
 기타를 매고 코난과 동행하는 순례자 페르민. 카미노 프랑스부터 포르투갈로 이어지는 긴 도보여행 중이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혼자냐고요? 천만에요. 자녀가 셋이나 있어요. 와이프도 아주 잘 지내고 말이죠."
"그런데 왜 순례를 하는 거죠? 개를 데리고 순례하는 다른 이들은 보통 혼자 살던 걸요."
"오, 난 그렇지 않아요. 분명 아내의 허락을 받고 나온 길이에요. 조금 더 나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죠. 다들 가정을 두고 떠났다고 하면 이상한 시선을 보내더군요. 단지 몇 달 뿐이에요. 이 시간 동안 다른 순례자들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도 내 위치와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거예요."

"개는 그렇다 치고 기타도 가지고 다니고 있군요?"
"기타와 개는 나에게 가장 친근한 동료이자 의지가 되니까요.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순례자에겐 꼭 필요한 것이랍니다. 가끔 들판에 앉거나 교회에 들어가 기타를 연주하면서 그리움을 견뎌내죠. 코난 이 친구도 음악을 즐길 줄 안다니까요."

'카미노 데 산티아고' 루트 중간에 있는 산토도밍고에 사는 그는 프랑스 길이 끝나면 계속해서 포르투갈 길을 가겠단다. 그를 보니 문군은 문득 일흔 셋 이탈리아 순례자 안젤로의 천연덕스러운 농담이 생각난다.

'내가 가정을 두고 혼자 여행한다고 집에 남은 와이프가 서운해 할 거라고? 천만에! 아마 와이프가 더 좋아할지도 몰라. 골칫덩어리를 보내고 완벽한 자유를 얻었으니까!'

순례 중간에 친구 조르조의 발목 부상으로 아쉽게 중도하차해야 했던 그는 지금쯤 고향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그가 페르민의 모습으로 현현한 건 아닌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 때 바삐 걸음을 움직이던 페르민이 실례를 구하며 문군에게 이른 작별인사를 건넨다. 동이 트기엔 아직 먼 시간이다.

아침밥도 해줬는데 점심까지 사겠다니... 천사구나

처남과 매형 사이인 헬리오스와 하비.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젠틀한 그들에게서 진짜 남자의 향기를 느낀다.
 처남과 매형 사이인 헬리오스와 하비.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젠틀한 그들에게서 진짜 남자의 향기를 느낀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오늘도 문군의 동행자는 헬리오스(Helios)와 하비(Javi)다. 하비의 여동생이 헬리오스의 아내니 둘은 매형과 처남 사이. 여기에 노총각인 문군이 합세한다. 진짜 스페인 길동무가 함께하니 문군은 마냥 든든하기만 하다. 아침 찬바람에 나와 예배당 안과 밖에 순례자 벽화가 그려진 콜룸브리아노스(Columbrianos)의 산 블라스 교회(San blas)에서 잠시 쉰 것을 제외하곤 계속 전진이다.

순례자를 위한 숙소 및 레스토랑·카페와 기념품점이 많은 카카벨로스(Cacabelos)에 도착한 건 정오 무렵. 언제부턴가 시골 길을 걷다 붐비는 길에 들어서면 마치 산세에서 속세로 들어온 수도사처럼 문군은 살짝 혼란스러워짐을 느낀다. 게다가 순례 중인데 자꾸 현세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온당한 자세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 중이다.

반듯한 걸음이 자꾸 풀려 쇼윈도로 방향을 틀게 된다. 차분한 풍경이 아닌 화려한 현대식 간판에 시선이 꽂힌다. 혀는 더욱 심하다. 냉정하게도 속세의 달콤함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식사를 위해 들어간 레스토랑, 문군은 밥과 우유·설탕을 섞은 맛이 나는 '레체 콘 아로스'를 주문한다. 계피가루 넣은 맛이 꽤 괜찮아 시장함을 달래는데 안성맞춤.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 역시 구수하다. 올리브 기름과 소금에 찍어먹은 맛이 이렇게 풍부할 수가 있나 그저 놀랄 따름이다.

문군에게 모든 식사의 후식에 콜라가 빠지면 섭섭하다. 누가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와인의 길이라 칭했는가. 콜라 두 병을 홀짝 마신 뒤라야 개운함을 느끼는 문군의 미소에 이 고장 레드 와인으로 입가심을 한 헬리오스가 만족스러운 듯 시선을 맞춘다. 아침에 모든 순례자들을 챙겨줬던 그가 이번에는 문군을 위해 선뜻 점심값을 지불하겠단다.

"매력적이다... 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볼 수 있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볼 수 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 여행하는데 당연히 내가 내야지. 내가 한국에 놀러 가면 그땐 네가 사."
"그럼, 내 것도 같이 내는 거야?"
"매형, 거참…. 우리 건 각자 따로 냅시다. 하하, 농담이야. 내가 낼게."
"정말 고마워. 둘 다."
"뭘, 우린 이미 가족이잖아!"

"근데 잠깐!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 헬리오스 네 아내야?"
"응, 결혼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어. 한 번 볼래?"
"오호, 매력적이군. 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
"당연하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게다가 상냥하고, 긍정적이기도 하지."
"맙소사, 문군, 그는 내 여동생을 끔찍이 사랑한다고. 착각에 빠진 거야. 난 동생과 매일 싸웠기에 적나라한 실체를 알고 있는데 말이야."

카미노 순례 초반 앙헬과 다비드의 따뜻한 품을 기억하는 문군에게 새롭게 다가온 두 남자. 어느 새 정이 들어 하루 종일 같이 길을 걸으며 서로의 속을 나누는 사이가 돼간다. 와이프 사진을 보고 연신 '하트 뿅뿅'이 되는 헬리오스와 그런 그와 가장 막역한 친구가 된 하비.

하비는 헬스장을 운영하다 자금난에 부딪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 경제가 휘청거리는 여파로 작은 중소도시에서 헬스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헬리오스를 따라 카미노를 걷는 이유 역시 사업을 접어야 할지 모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그의 고민을 가장 잘 들어주는 이가 헬리오스니 둘의 대화가 진지해질 수밖에. 얼마 후, 둘의 대화에 한 걸음 떨어져있던 문군에게 분위기 반전용 멘트가 쏟아진다.

청순한 사진 속 그녀... "이런, 진짜였다니"

한껏 여유를 부리는 순례자 모습을 그린 벽화. 복장을 보아하니 여름철인가 보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순례자 모습을 그린 벽화. 복장을 보아하니 여름철인가 보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문군, 정말이라니깐! 카미노 순례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 내가 막내 여동생 소개시켜 줄테니."
"아니, 헬리오스의 와이프인 네 동생은 구박하면서도 왜 내겐 다른 태도야? 이거, 신뢰가 안 가는데?"
"아시아 남자들이 자상한 편이지 않아? 동생이 무척 좋아할 거야. 이제 스물 한 살이라니깐."
"뭣이?"
"문군, 이 친구 말이 맞아. 처제 정말 예뻐. 게다가 신앙심이 신실하기까지 하지."

신뢰감을 주는 자상한 헬리오스까지 옆에서 바람 넣는다. 이전에도 여동생 떡밥으로 문군을 적잖이 당황시키던 하비는 틈만 나면 외로운 남심을 공략한다. 둘은 문군의 난감해 하는 표정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기만 하다. 21세 미모의 여대생이라. 본능적으로 끌리지 않을 수가 없지만 문군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그의 신조는 확실하지 않으면 떡밥을 물지 않는 '연애 보수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순례자에게 길 안내를 해주는 조가비 모양의 화살표.
 순례자에게 길 안내를 해주는 조가비 모양의 화살표.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삶에 있어서 때론 담담한 거절도 필요한 법. 문군은 이쯤에서 농담은 그만 하자는 취지로 완곡한 거절 의사를 내비친다. 사실 하비의 눈썰미가 그와 다른 것도 한 이유다. 그가 보여주는 휴대전화와 페이스북 사진첩에는 온통 아름다운 여성들이 가득하다. 그가 관리하는 헬스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많은데 시원시원한 몸매와 이목구비는 단아함을 사모하는 문군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셋이서 함께한 행복했던 날들이 페이드아웃처럼 사라지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를 마친 어느 날, 페이스북 친구를 맺은 셋은 온라인에서 다시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문군은 하비의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야말로 헬스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들의 향연이다. 하비 생각에 괜히 키득키득 거리다가 본인 생각에 급격히 서글퍼지면서 투덜대던 그때. 그러니까 그의 볼이 상당히 빨개지고 난 뒤 서글서글한 눈매와 깊고 그윽한 눈웃음, 철퍽철퍽 청순함이 깊게 젖어있는 한 장의 사진을 보던 문군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새어나온다.

'이럴 수가, 진짜였어…. 진짜였다니! 가만, 하비네 집이 어디였더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2월 2일의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태그:#산티아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