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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 지어진 산타 마리아 성당. 오세브레이로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에 하나다.
 9세기에 지어진 산타 마리아 성당. 오세브레이로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에 하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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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봄의 기운을 맛보았던 에레리아스 마을을 지나는 길.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다시 혹독한 겨울 날씨를 맞아야 했다.
 잠시 봄의 기운을 맛보았던 에레리아스 마을을 지나는 길.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다시 혹독한 겨울 날씨를 맞아야 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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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해도 너무하는군.'

카미노의 석양이 지고 있다. 감상에 젖을 풍경이 아니다. 아침에 산을 한 번 넘고, 정오부터 다시 계속 해발 1300m 고지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문군은 순례고 뭐고 못해먹겠다며 몇 번이나 씩씩대곤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들어주는 이도, 도와주는 이도 없다. 정상인 오세브레이로(O'cebreiro)로 가는 길은 두 곳이 있는데 다른 순례자들은 모두 경사가 급한 오솔길을 따라갔고, 문군만이 자전거 전용 도로로 빙 둘러가기 때문이다. 답답함에 골짜기에 있을 순례자들을 향해 고함을 쳐보지만 되돌아오는 건 자신의 삐친 목소리뿐.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숱한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뒤에서 밀어주는 이가 있었다. 이번엔 혼자다. 혼자서 산 중턱까지는 그래도 잘 버텨가는 중이다. 오세브레이로는 '레온(Leon)'이 끝나고, 새로운 '갈리시아(Galicia)' 지방의 시작을 알리는 마을이다. 동시에 고된 행군을 통해 정복하는 산 정상의 마을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남다른 의미'는 남다르게 풀어야 한다는 게 문군의 신념이다.  

지난밤, 페레헤(Pereje)의 숙소는 정말이지 악몽이었다. 시골 펜션 같은 건물을 독차지한다는 낭만적인 기쁨도 잠시, 큰 목조건물에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기에 그만 동장군의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문군은 몇 벌의 옷을 겹쳐 입고, 슬리핑백에 이불까지 덮고도 밤새 오들오들 떨며 뒤척여야 했다(여름이었다면 순례자 숙소 베스트 3 안에 들 장소로 손색이 없다). 아침에 그는 침낭에서 빠끔히 눈만 내밀고, 십여 분 넘게 기상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거친 뒤 몸을 바지런히 움직이는 것으로 추위를 녹여야 했다.

근육이 결리고, 뼈마디가 시린 이유는 비단 삼십대에 접어들어서 뿐만은 아니다. 문군은 부실한 잠자리가 불러온 참상을 완벽하게 체득했다. 그저 시장기만 면하기 위해 딱딱한 빵을 기계처럼 씹어 먹는 아침 식사 내내 그는 온수에 샤워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했다.

오르고 올라도 계속되는 길... 갑자기 눈발까지 날리네

베가에서 잠깐의 안식을 허락받은 작고 노란 교회 내부 모습.
 베가에서 잠깐의 안식을 허락받은 작고 노란 교회 내부 모습.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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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군은 오전 내내 묵언수행하며 걷기만 했다.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이 반가워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 곳은 베가(Vega), 오늘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마켓이 있는 곳이다. 점심 역시 빵과 주스로 대충 때운 그는 작고 앙증맞은 노란색 교회에 들어가 잠시 묵상하며 심신을 달랬다. 아무도 없는 성스러운 공간에서 혼자 그 고요하고 거룩한 흐름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는 것, 믿는 자에게 존재하는 신을 홀로 마주한다는 것, 그는 자신이 예배당에만 오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또한 언제나 옅은 떨림으로 갈무리되는 신의 은총과 자비를 확인하는 느낌이 좋기도 했다.

베가에서 에레리아스(Herrerias)로 가는 길은 훌륭했다. 두 시내가 만나 페레헤강이 시작되는 에레리아스는 강을 따라 지어진 석조건물들이 인상적이었고, 알록달록, 아기자기하게 건축된 몇몇 건물들과 살랑살랑 거닐기에 안성맞춤인 흙길의 매력에 문군은 그만 흠뻑 빠져버렸다. 무엇보다 봄의 기운이 충만한 색감어린 이곳에 곧장 짐을 풀고만 싶었다. 하지만 문군은 계속 산길을 올라갔다. 그가 지금 이렇게 몹시 화가 나려고 하는 까닭은 계속 올라가도 계속 그 자리인 것만 같은 곳에서 당하는 무력함과 남몰래 숨겨온 은밀한 꿈이 깨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꿈이 에레리아스를 미련 없이 지나치게 만들었으니까.

한겨울에 산을 오르는 그의 상의는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다. 골짜기에 튀어 나온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한 그는 다시 좀비 걸음이 된다. 방도가 없다. 가다보면 끝은 반드시 있을 거란 한 줌 희망이 그를 걷게 하는 동력의 전부다. 석양이 옅어지고,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젖은 땀이 마르면서 몸이 으슬으슬 거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영혼은 더욱 곤고해진다.

다른 표지판과 달리 멋스러움을 낸 에레리아스의 카미노 표지판.
 다른 표지판과 달리 멋스러움을 낸 에레리아스의 카미노 표지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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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배낭들.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지고, 길을 걸어야 한다. 그 짐은 자기가 준 것이다.
 순례자들의 배낭들.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지고, 길을 걸어야 한다. 그 짐은 자기가 준 것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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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다!"

각고의 노력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던 시간이다. 닿지 않을 듯 멀리서 보이던 산을 넘어 마침내 도착한 마을. 아이와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문군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데서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안녕, 꼬마야. 알베르게가 어디 있니?"
"알베르게는 바로 저 집이에요. 오늘밤 묵으시게요?"
"응. 혹시 여기 온 순례자들을 못 봤니?"
"아뇨, 못 봤는데요."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 오세브레이로 아니니?"
"오세브레이로요? 여긴 라구나(Laguna)에요. 거기까지 3km는 더 가야해요."
"라구나라니? 라구나라니!"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산 정상에 떡하니 위치한 마을은 누가 봐도 종착지다. 그 풍경에 제대로 낚인 것이다. 하긴 마을은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잘못한 건 섣불리 오판한 그의 판단이다. 레온 지방의 마지막 경계를 지키고 서 있는 라구나의 새침 떼는 듯한 표정에 괜한 배신감을 느끼는 문군은 그만 헛웃음이 나온다. 현기증으로 다리가 풀리고, 동공이 풀린다. 아까부터 핸들에 대롱대롱 매달린 정체불명의 까만 비닐들도 덩달아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밑에선 보이지 않았던 길이 마을 뒤로 계속 이어진 게 보인다. 또 오르막이다. '털썩', 문군은 체념한다.

'이건 말야, 악마의 농간이야.'

칼바람이 볼을 때리고 눈발이 시야를 가리는 악천후 속에서 마침내 당도한 갈리시아 지방의 첫 마을 오세브레이로. 기진맥진한 문군 눈에 하얗게 눈이 쌓인 마을 전경과 그를 기다리던 두 순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예부터 태양이 서쪽으로 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순례자들이 모여 들었다는 이 마을에서 그는 운 좋게도 막 떨어지는 낙조를 보고 있다. 순례자들은 외로운 길을 걸어 꼴찌로 입성한 문군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그가 건넨 '블링블링'한 비닐봉지를 야무지게 쥐어 잡는다. 

자전거를 밀고 종일 산을 오르면서 한없이 무력한 나를 발견하고, 다 오르고 나면 성마른 성정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연에 대해 겸허해지게 된다.
 자전거를 밀고 종일 산을 오르면서 한없이 무력한 나를 발견하고, 다 오르고 나면 성마른 성정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연에 대해 겸허해지게 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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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지방이 끝나고 갈리시아 지방이 시작되는 라구나에서 바라본 풍경. 이 산을 오르느라 진을 빼야했다.
 레온 지방이 끝나고 갈리시아 지방이 시작되는 라구나에서 바라본 풍경. 이 산을 오르느라 진을 빼야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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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를 걸은 이래로 가장 많은 각국의 순례자들이 합류해 모인 저녁. 문군이 포기하지 않고(못하고), 꿋꿋이 걸어온 이유를 잘 아는 몇몇은 화색이 돈다.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둘러앉은 문군도 어느새 얼어있던 마음이 녹아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인애한 성인군자로 거듭나려는 시간을 맞고 있다. 프라이팬에선 영혼을 위로하는 향기가 배어나오고, 냄비에선 육신을 격려하는 뜨거운 정열이 피어나고 있다.

그렇다. 마지막 마켓이 있는 베가에서 문군은 고심 끝에 십자가를 맸다. 두 순례자와의 상의 끝에 돼지고기, 야채와 음료, 그리고 볶음밥 재료들을 두 비닐봉지에 가득 챙겨 산을 넘은 것이다. 옅은 떨림이 있었던 그 작고 노란 예배당을 빠져나와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떠오른 영감, 산 정상 알베르게에서 돼지고기를 쌈 싸먹겠다는 순례자의 간절한 꿈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 예배당에서 천사가 속삭여 준 거라고 문군은 그렇게 믿고 있다.

가슴 뭉클한 고기 익어가는 마을 오세브레이로, 한 순례자의 헌신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밤, 문군이 다른 순례자들로부터 항상 받아왔던 그것, 카미노는 사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2월 3일의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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