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월 8일) 아침 일찍 내가 회원으로 있는 '정농회'에서 문자가 왔다. 원경선 이사장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향년 98세). 나는 바로 김준권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조의를 전했다. 그는 고인의 사위이자 정농회 전 회장이시다. 지난달 어느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 내가 원경선 이사장님 안부를 묻자 아무래도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고인을 처음 만난 때는 내 나이 열일곱 때, 1970년 중반이었다. 경기도 부천시 산기슭에서 풀무원 농장을 일군 고인의 삶을 아시는 분들은 '아니, 그럼 전희식이가 고아? 부랑아?' 하실지 모른다. 그분이 농장을 일구면서 10대 중반쯤 되는 '거리의 아이들'을 거두셨고 그 아이들을 자식들과 똑같이 키우셨으니까.
첫 대면 당시 나는 고등학교 신입생이었고 고인은 우리 학교 이사장님이셨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의 전영창 교장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둘 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텀벙텀벙 바짓가랑이 다 적시며 가는데 비해서 우리 이사장님은 바지를 살짝 걷고 물방울도 안 튀기면서 가시는데 나보다 더 빨라!" 교장선생님이 워낙 강직한 분이라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으로 투옥도 되시고 박정희 정권 때는 학교에서 일어난 3선 개선 반대시위로 교장직에서 해임도 되셨던 분이라 텀벙거리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알 듯한데, 살금살금 조심스레 시대를 거슬러 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싶었다.
원경선 이사장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었는지 알게 된 것은 내가 20여 년 전 귀농을 하면서다. 바른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모임인 '정농회'에서 다시 만나면서다. 평생을 곧게 살아오신 분답게 얼굴과 눈빛이 소년처럼 맑고 인자하셨다. 내 손을 쓰다듬으면서 옛 인연들 이야기를 하셨고 내가 정농회 회원이 된 것을 축하해주셨다.
원 이사장님의 이야기는 그 전에 이미 간간이 들었었다. 내가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의 투쟁현장을 전전할 당시인 1987년. '민중의당' 시절에 고인의 장남인 원혜영 선배(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는 우리와 입장이 달라 또 다른 진보정당을 표방한 '한겨레당'을 시작한 때였다. 그가 원 이사장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농사를 짓게 될 줄은 몰랐고 '정농회'라는 데서 원경선 이사장을 만나리라 상상도 못했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재작년 겨울이다. 한겨울 산중 기도 중에 운명하신 강대인 선배 장례식에서다. 당시 강대인 선배는 정농회 회장이었다. 3일 동안 장례식장에서 장례준비를 하는 중에 원경선 이사장님을 만났다. 의사표현이 원활하지는 않아도 사람은 잘 알아보시는 듯했다.
참으로 귀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겨레> 신문 등에 고인의 삶에 대해 크게 보도되고 있다. 늘 되풀이되지만 왜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 못했을까. 오래 사시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도 말이다. 우물쭈물 헛된 일과를 보내다 이렇게 때를 놓치고 마는구나. 몇몇 분 마음 속 스승들을 올해는 작정하고 찾아뵈어야지 다짐한다.
나는 김준권 선배에게 물었다. 원 이사장님 장수 비결이 뭐냐고 새삼스레 물어봤다. 지난달에 만났을 때 들었지만 다시 정리해보고 싶어서다. 지난달에도 김준권 선배는 우리 어머니 설사 얘기를 했더니 현미를 볶아 드시게 하라고 일러줬고, 며칠 뒤에는 현미밥 짓는 법과 현미차 끓이는 아주 독특한 방법을 메일로 보내줬다.
대답은 기대했던 대로였다. 고인은 평생을 현미를 드셨다고 한다. 철저한 소식과 채식으로 건강을 지켰다고 일러주었다. 만인의 소망은 오래 사는 것 못지않게 건강하고 청정하게 사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돌아가신 분을 통해 배움을 얻고자 다시 물었다. 100년을 사시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을텐데 그 많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셨느냐고.
다 내려놓으셨다고 한다. 기대도 욕심도 바람도. 일제 시절과 6.25, 박정희 군부독재의 통일벼 장려 때는 유기농 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빨갱이로 몰았다고 한다. 거창고등학교가 정권과의 마찰로 폐교 위기에 몰렸을 때도 폐교 자체가 살아 있는 교육이 되는 거라고 주장하셨을 정도라고 하니 모든 것을 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감히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으리라.
바른 삶. 건강한 몸. 복을 누리는 삶. 간단할 수 있다. 뭘, 어떻게 먹느냐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핵심인 셈이다. 머리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