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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롭다.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안토니오의 옆에는 카미노에서 처음 만난 초로가 함께 한다. 너덜해진 스페인 풍 괴나리봇짐에 지팡이, 그리고 색 바랜 낡은 털모자. 뒷모습만 보면 탁발승이라도 불러도 손색없을 범상치 않은 행색이다. 그가 간간이 균형 잃은 안토니오를 부축한다.

위태로운 아비 곁엔 아들이 있었다

필자가 전날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나 인사 나눈 안토니오와 세바스찬 부자. 맑고 환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필자가 전날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나 인사 나눈 안토니오와 세바스찬 부자. 맑고 환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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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m쯤 떨어진 그들의 뒤, 문군이 카미노에서 만난 가장 어린 순례자인 열다섯의 세바스찬이 혼자 걷고 있다. 어리지만 의젓한 풍채다. 보통은 혼자 사색하지만 때때로 어른들과 말도 섞을 줄 안다. 점심시간 무렵, 이번엔 세바스찬이 200m쯤 앞선 길에서 되돌아 온 길을 응시하며 카미노의 간이 벤치 주위를 서성거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비스찬이 보폭을 조절하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 때문이다. 안토니오와 세바스찬은 부자지간이다. 세바스찬은 아버지가 순례를 즐길 수 있게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동행중이다. 자신과 함께 걸을 경우 아버지가 다른 순례자들과의 활발한 교제를 나누기 힘들까봐 일부터 먼발치에서 동행하는 것이다. 둘은 사리아에 도착한 지난 밤 문군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산티아고 길을 걷는 이유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대학에서 스페인 문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어. 근데 어느 날 몸이 말을 듣지 않더라고. 그러다 바닥에 푹 고꾸라진 거야. 앞이 캄캄했지. 병원에 실려 가면서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검사 결과 뇌종양이더라고. 막막했어. 자식들이 한창 커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러지 않겠어?"

"아빠가 쓰러졌을 때 참 많이 우울 했었어요. 다시는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결과적으로 병이 많이 호전되어 몸은 다소 불편하지만 이 정도까지 건강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덕분에 부자 관계도 더 좋아졌어요. 대화가 더 많아졌거든요. 산티아고 길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엄마랑 동생은 집에 있고 우리 둘만 왔지요. 아빠가 꼭 한 번 더 걸어보고 싶다고 그랬거든요."

안토니오(우)와 세바스찬. 카미노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의 순례자들이다.
 안토니오(우)와 세바스찬. 카미노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의 순례자들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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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회복은 됐다지만 여전히 뇌종양 환자로 살아가는 안토니오는 삶에 대한 겸허함을 깨닫고, 행복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있다.

"카미노에는 확실히 강한 메타포가 있어. '삶은 길'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게 아마 내가 이 길을 걷는 영적인 이유가 될 거야. 진심이야. 지금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아무 상관없던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 잔 커피를 즐길 줄 아는 이런 시간이 소중한 행복이란 걸 알게 됐어. 아주 사소한 일상의 것들이 알고 보니 내가 모르고 지냈던 충만한 기쁨이더라고. 진즉에 이랬어야했어. 다니엘(세바스찬), 넌?"

"아빠 때문에 오긴 했지만 나도 이 길이 참 좋아요. 여긴 지구상에 인종, 성별, 종교 및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행지에요.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는 표정을 보면 내가 행복하니까 더없이 의미 있는 길이죠."

안토니오의 실루엣이 보인다. 초로의 팔을 잡고 힘겹게 걸어오는 모습이다. 세바스찬은 걱정이 되는지 얼른 아버지에게로 다가간다. 안토니오는 괜찮다고 손을 내젓다가 이내 왼손으로 아들의 팔을 잡는다. 양쪽에 든든한 조력자가 있으니 성치 못한 몸으로 걷는 이 길이 외롭지 않다. 단지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지만 오늘 가장 행복한 미소가 꽃 핀 순례자가 바로 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걷지 않는다고 순례가 아닌가?
안토니오와 세바스찬 부자가 정해 놓은 짧은 구간의 순례를 마치고 택시를 타러 간다. 몸이 불편한 안토니오는 배낭이 없다.
 안토니오와 세바스찬 부자가 정해 놓은 짧은 구간의 순례를 마치고 택시를 타러 간다. 몸이 불편한 안토니오는 배낭이 없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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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1km 후에 도로가 나와요. 택시 불러 놓을게요. 천천히 오세요."

부자는 모든 길을 다 걸을 수가 없다. 하루에 5km, 때론 10km를 걷다가 택시로 목적지에 가서 마실 거닐며 순례자들을 기다리곤 한다. 컨디션 조절 때문에 택시 이용은 필수 불가결하다. 조금 더 걷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자세로 조금 더 길 위에 머물 수 있는 행복을 선물 받는다. 걷지 않는다고 순례가 아닌가?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순례의 의미도 없다. 그가 다시 카미노로 돌아온 건 기적이다. 그렇기에 둘은 누구보다 깊은 치유로 점철된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다.

다시 세바스찬이 앞서 나간다. 잠시 헤어지는 시간에도 손을 흔들어 살가운 부자 사랑을 표현한다. 안토니오는 초로를 의지했던 팔을 내리고 혼자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위태로움에도 당당하고 아름다운 이 느낌은 뭔지 그와 보조를 맞추는 문군의 가슴이 조용히 뜨거워진다.

"포르토마린에 도착하면 술 한 잔 걸쳐야겠어."
"술은 몸에 안 좋은데요?"
"내가 카미노를 걷는 이유 하나가 더 있지. 맛 좋은 포도주 마시러 왔어. 좋은 술이 좋은 인생을 만들어 내는 걸 모르시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2월 6일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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