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독일 시인 괴테(1749~1832)는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 속담에도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다. 글 쓰는 사람들도 '첫 문단을 마치면 절반은 작성한 셈'이라고 말한다. 처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가 되겠다. 책이나 신문 등 일반 간행물의 '창간호'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성격은 달리하지만, 의미는 같을 게다. -기자 말-

군산문화원(원장 이복웅)은 향토문화 계승·발전과 정체성 홍보를 위해 <군산문화> 제25호를 발행했다. 지난 연말 발행된 <군산문화>는 군산문화원이 한 해 동안 개최한 각종 추모제와 민속놀이, 시민과 함께하는 향토문화 탐방,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행사, 2년 만에 개최한 진포대첩 재현, 심포지엄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화보로 엮었다.

또한, 천형균 군산대 명예교수의 '조선 시대의 중인(中人)'을 특집으로 꾸몄으며 김양규 향토문화연구소장의 '조선 종전의 기록'과 이영룡 군산문화원 감사의 '우리나라 근대의 교육 발달사' 등을 실었다. 이밖에 이진원 부원장과 편성희 수필가의 수필, 배환봉 이사와 이소암·이경아 시인의 시, 시민기자의 문화기행 참관기 등 재미있는 읽을거리도 담았다.

한 세기 역사가 들여다보이는 <군산문화> 창간호

 <군산문화> 창간호 표지. 뒷표지(오른쪽), ‘금강하구지역 광역개발구상도’가 세월의 변화를 실감나게 한다. 세계 최장(33.9km)의 새만금 둑이 보이지 않아서다.
<군산문화> 창간호 표지. 뒷표지(오른쪽), ‘금강하구지역 광역개발구상도’가 세월의 변화를 실감나게 한다. 세계 최장(33.9km)의 새만금 둑이 보이지 않아서다. ⓒ 조종안

군산문화원은 직선제 요구 시위로 거리에 최루탄 냄새가 가득하던 1986년 7월 12일 문화체육부장관의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초대 원장은 물질문명에 파괴된 자연성 회복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생명의 존엄과 자유를 노래했던 이병훈(1925-2009) 시인. <군산문화> 창간호는 언제 발행됐으며 어떤 내용이 실렸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군산문화원 서고에 보관된 <군산문화> 창간호(1987년 발행)는 첫머리에서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꿈꾸고 공포(1968)한 '국민교육헌장' 냄새가 짙게 풍기는 '문예중흥선언문'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었기 때문. "맹목적인 복고 경향을 경계하고, 분별없는 모방행위를 배척하며, 천박한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대목은 실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이봉섭 군산시장의 축사와 김두영 군산대학장의 권두사에 이어 '진포대첩과 최무선'(李柵), '금강 하류 지역의 선사문화 소고'(이세현), '군산을 중심으로 한 3·1독립운동'(김양규), '군산·군산항-그 개발과 전망'(고태곤), '군산 일대의 지명 소고'(고헌), '군산의 설화'(박순호), '쑥대머리와 명창 임방울'(정양) 등 내용은 다양하고 풍부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지사들에 대한 총독부 소속 판사의 판결문.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지사들에 대한 총독부 소속 판사의 판결문. ⓒ 조종안

 군산 월명산에 세워진 3·1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군산 월명산에 세워진 3·1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조종안

정부 보조와 시민 성금으로 1986년 12월 월명산에 삼일운동 기념비를 세웠다는 내용과 1919년 3월 6일 설애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주동한 영명학교 교사, 학생, 야소병원(구암병원) 직원들의 판결문 복사본(62쪽 분량)은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3·1 만세운동으로, 태극기(3500장)를 제작해서 시민에게 나눠주고 횃불시위를 한 죄로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공판 중인 군산지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큰 사명을 안고 나선 것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힌 이병훈 원장의 창간사에서 "쌀의 문화를 발굴하자"는 대목과 "오늘 첫발을 내디딘 <群山文化> 지가 나이 들수록 군산의 여러 내용의 문화생활이 바로 서게 되고, 살기가 물질뿐 아니라 마음으로 윤택하고 풍요로워지며 군산의 참모습을 보여주는데 늘 횃불의 역할을 다하기를 다짐한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시내 남녀고등학생을 상대로 공모한 생활수기 입상작 8점도 눈길을 끌었다. 그중 군산여상 2학년 한선주 학생의 <신문 배달>(최우수상)은 군산 미군비행장 영내에서 낮에는 신문을 배달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가 체험한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은 앞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는 마지막 대목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1987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시내 신세계다방에서 개최한 '군산 향토사료 사진전'(군산진 지도와 사료사진 등 105점 전시)과 그해 6월 20일 군산대 백제문화연구회, 수맥회 등 학생 100여 명과 함께 시내 선사유적지, 고려 때 조창(漕倉)지, 삼일운동 발상지, 군산진 터 등을 돌아본 '군산역사 기행' 소개는 한때 '사진'에 빠졌던 적이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옛날에 '찐빵 내기' 했던 '아흔아홉 다리'

 지금도 아흔아홉다리로 불리는 경포천 철교. 옛 군산선이 지나간다.
지금도 아흔아홉다리로 불리는 경포천 철교. 옛 군산선이 지나간다. ⓒ 조종안

동네 아저씨·아주머니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군산대 고헌 교수의 '군산 일대(一帶)의 지명 소고'에서 설애(京浦)의 말뜻, 설애 시장풍경, 둔뱀이(둔배미), 모시산, 째보선창, 콩나물 고개, 흙 구더기, 아흔아홉 다리, 석치산 마을 등에 대한 유래와 고증은 추억여행을 떠나게 했으며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만 알았는데, 조상들의 발자취요, 고장의 향토사요, 설화였기 때문이었다.

개항(1899) 이전까지 삼남지역 물화를 선편을 이용, 서울(개성, 한성)로 올려 보내는 포구였고, 큰 장도 섰던 '설애'는 京浦의 우리말 발음이 변이된 것으로 알려진다. 서래산 아래 '수문'(서래다리)이 있던 지금의 중동 로터리 일대(경암동, 경장동)를 가리키며 京의 발음 '서울'과 浦의 '개'를 합해 '서울개'로 불리다가 설개-설애-서래로 바뀌었다는 것. 1937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스레'로 소개하고 있으며 옛 어른들도 '스레'라 불렀다. 경암동, 경장동 등의 동명도 경포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아흔아홉 다리'는 조선 숙종 27년(1701)에 제작된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 표기된 다리(송경교)를 지칭하며 군산선(1912)이 지나는 철교와 함께 코흘리개 아이들에게도 흥밋거리였다. 개천에 물귀신이 숨어있다고 해서 가까이 가기를 꺼렸음에도 철교 침목이 99개가 맞는지, 송경교 길이가 99걸음이 되는지 발로 확인하면서 '찐빵 내기'를 할 정도였다. 아흔아홉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으나 다리가 길어서 붙여졌다는 게 중론이다.

3천 마리 학이 춤추는 것 같다 하여 지어진 '삼학동'

 개발 중인 삼학동 모시산. 1950년대에는 임자 없는 유골이 자주 발견되었다.
개발 중인 삼학동 모시산. 1950년대에는 임자 없는 유골이 자주 발견되었다. ⓒ 조종안

'모시산'은 지금의 삼학동(三鶴洞) 일대에 있던 나지막한 야산을 일컫는다. 조선 시대 서울로 보낼 모시와 삼배를 이곳 야산에 삼막(창고)을 짓고 말뚝을 박아 건조했는데, 바닷바람에 너울거리는 모습이 3천 마리의 학이 춤추는 것처럼 장관을 이루어 '삼학동'이라 하였고, 야산도 '모시산'이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1940) 남정(南町)으로 부르다가 해방 후(1952) 삼학동으로 개칭했다.

조선 시대 설애 포구는 충청·전라 각지에서 배와 마차에 가득 싣고 온 곡물, 과일, 건어물, 직물 등의 집산지로 그중 한산 모시와 나포면 숫골(마촌) 특산품 삼배를 모시산에서 말렸던 것. 모시와 삼배 말리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으며, 해방 후에는 화교들이 언덕배기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궈 먹었으며, 개발 붐이 일었던 70년대 이후 대부분 산이 사라지고 주택단지가 되었다.
  
'둔배미'는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를 경계로 지금의 둔율동을 말한다. 옥구군 미면 둔율리(屯栗里)였으나 일제강점기(1932) 군산부에 속해 둔율정(町)이 되었다. 조선 숙종 때 군산진 병사들이 머무는 둔소(屯所)가 있었고, 아래 논들을 둔전(屯田)이라 하였다. 주변에 유독 밤나무가 많아 '둔밤이'라 불리었는데 어원이 변이되어 '둔배미'가 되었다 한다. 일대에 방죽이 많아 사투리로 '둠벙이'로 불리다가 전화하여 '둔배미'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방의 인쇄소 설비가 열악해서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사진집도 서울까지 올라가 인쇄해야 했던 80년대. 그 시절에 발행된 <군산문화> 창간호를 읽으면서 향토사의 소중함과 기록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복웅 저 <군산의 지명유래>를 참고했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군산문화#아흔아홉다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