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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숙과의 대화

2001년, 12년 전 봄이었다. 당시 군대에서 갓 제대한 나는 어학연수 갈 자금을 벌기 위해 군대서 만들어 놓은 체력으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비보가 하나 날아 들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아버지께서 그래도 고향이라고 찾아가면 유일하게 꼭 찾아 뵙던 분이 작은 할아버지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난 작은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숙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에는 아주 가끔 얼굴만 보고 지나치던 사이였건만, 당숙은 내가 그래도 제대까지 하고 나니 그제서야 말상대처럼 보였는지 이것저것을 물어왔고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그럭저럭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 것은. 당숙은 내게 물었다.

"희동아, 제대도 했으니 이제 슬슬 취업 준비하는 거냐?"
"에이, 뭐 벌써부터 취업준비를 해요. 돈 좀 더 벌어서 어학연수부터 다녀오려고요."

"그래? 그나저나 너 사회학과지? 넌 S사 들어올 생각은 마라."
"예? 왜요?"

"Y대 사회학과는 안 뽑아. 너희들은 입사하면 꼭 노조 만들겠다고 법정까지 가거든. S대 출신은 아니꼬우면 나가고, K대는 법정까지 가더라도 선배가 설득하면 결국 포기하고 마는데 Y대 사회학과 녀석들은 끝까지 가지. 독해. 그래서 내부적으로 Y대 사회학과 안 뽑는 건 거의 불문율이야. 그러니 S사는 포기하는 게 좋을 게다."

물론 당숙의 말은 시중에서 돌고 있는 소위 SKY대와 관련된 유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고지식한 S대와 자유분방한 Y대, 그리고 집단주의적인 K대에 관한 우스갯소리는 사회적으로 으레 돌아다니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난 당숙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분의 경력을 대충이나마 알기 때문이었다. 소도시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다가 갑자기 S사에 입사한 당숙. 그 뒤로 당숙은 명절 때 집안 어른들이 모이기만 하면 S사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곤 하셨다. 어느 직원이 노조를 만들려는 동향만 보이면 하루 종일 그 직원 집 앞에서 기다리고 밤새 전화했다는 이야기와 그 주위를 감시하던 이야기 등.

그 뒤로 당숙은 S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S사에 전문적으로 인력을 공급하는 회사를 세웠다. S사가 그 뒤를 봐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어쨌든 그 덕분인지 몰라도 당숙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게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은 당숙이 출세했다고 모두들 부러워했지만, 당시 대학교를 다니며 사회학을 공부하던 내게 당숙의 그런 모습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비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당숙이 내게 위와 같은 충고를 하시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난 이후 S사 입사를 상상도 않게 되었고, 그들의 눈부신 성장과 매출이익 소식을 들을 때면 항상 쓴웃음부터 나왔다. 화려한 숫자 뒤에 가려진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는 할 수 없을지언정 개인적으로나마 소심하게라도 저항하고 싶었다.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만행

<오마이뉴스>가 '헌법 위의 이마트' 집중기획 보도 내용에 대해 이마트가 16일 오후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몇몇 직원 개인 차원의 행위이고 실행되지 않은 시나리오일 뿐이라고 해명해 "꼬리자르기"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헌법 위의 이마트' 집중기획 보도 내용에 대해 이마트가 16일 오후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몇몇 직원 개인 차원의 행위이고 실행되지 않은 시나리오일 뿐이라고 해명해 "꼬리자르기"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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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숙과의 대화가 있고 난 뒤 10년도 더 된 오늘. 그렇다면 2013년 대한민국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까?

안 된 일이지만, <오마이뉴스>에서 기획시리즈로 다루고 있는 이마트 사례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기업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S사의 10년 전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가 하나의 근거가 되어 회사가 사원을 감시하고, 노동자의 권리인 노조 설립마저 방해하는 만행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언론의 역할이다. 연말만 되면 사상 최대 매출이니 최대 영업이익이니 하며 마냥 떠드는 언론이야 말로 무노조 경영의 신화를 재생산해내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노동자, 협력업체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는 무시한 채, 기업이 많은 이윤만 내면 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언론의 편협된 사고와 이를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사회.

결국 이런 사회 분위기는 노조 파괴, 직원 감시 등과 같은 만행이 신세계 이마트, CJ, 삼성 등 뿌리가 같은 기업들을 넘어 사회로 확산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위의 기업들이 업계 최고로 평가받음으로써 오히려 다른 기업의 롤모델로 추천되는 바, 그 기업 출신의 임원이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 되는 등 그들의 경영노하우와 경영철학이 전 사회적으로 퍼지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교육 때문에 만났었던 컨설턴트 대부분은 S그룹의 경력을 한 줄 이상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노조 경영의 신화를 숭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더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노조 조직률이 채 10%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시민들은 국가와 다른 나의 견해를 밝히기 쉽지 않다. 일하는 직장에서조차 감시와 사찰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정부의 감시와 사찰은 더 거부하기 어렵지 않을까? 조직과 다른 생각을 하는 개인에 대한 보호막이 사라진 사회. 이미 우리는 그 비극적 결말을 MB정부 시대 때 목도하지 않았던가.

이번 이마트 사태가 결코 이마트 한 기업의 수사와 사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가 뿌리박힌 사회에서 이득을 보는 주체들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치권은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며, 시민들 역시 더 큰 연대를 통해 그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번 사건은 궁극적으로 노동자를 하나의 부속품으로 취급하는 이 시대의 비극이요, 감시와 사찰이 일반화 되어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제 우리가 행동할 때다.


태그:#이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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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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