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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
 광주천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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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길은 사람 따라 난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터는 사연 따라 자리를 잡는다. 광주천을 따라 걷다 보면 사람과 길과 사연이 흘러온 역사와 쉽게 만난다.

광주천 따라 걷기 2구간은 주남마을에서 시작해 방림교까지. 약 4.2Km가 넘는 길을 1시간 30분 동안 걷는 코스다. 사실 이 코스는 '광주천 따라 걷기 3구간'과 함께 광주의 근대역사 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광주천변 좌우로 근대와 관련한 여러 공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광주천 2구간 원지교를 중심으로 천변 좌로엔 인공 폭포와 작은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건너편인 천변 우로에서 증심사 방향으로 가다보면 홍림교가 있다. 광주사람들에겐 '배고픈다리'로 더 유명하다. 다리 모양이 배가 고파 홀쭉해진 모습을 닮았다 하여 '배고픈다리'다.

그 누군가가 다리가 오목하게 꺼진 모습에서 고픈 배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리가 배고픈가봐, 그럼 배고픈다리라 부르자"고 제안했을 터. 그리고 많은 이들의 그이가 붙인 다리 이름에 호감을 표하며 동의했을 것이다. 배고픈다리라는 이름 짓기엔 해학과 넉살, 여유라는 민중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이 민중의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배고픈다리가 1980년 5월 항쟁 당시에는 광주 시민군들이 공수부대를 방어하는 저지선으로 이용되었다. 민중으로부터 이름 지어진 다리답게 민중과 함께 참혹한 시절을 견디어 온 것이다.

원지교를 지나면 학동 백화마을이 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전재민촌(戰災民村)'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재민이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만주로 징용을 끌려갔다가 돌아온 이들과 생계를 위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을 말한다. 백화마을은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자금으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전재민에 대한 백범의 관심과 애정

원지교 생태공원에서 증심사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배고픈다리(홍림교)를 만날 수 있다.
 원지교 생태공원에서 증심사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배고픈다리(홍림교)를 만날 수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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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검의 정치자금으로 만든 전재민촌. 한 지붕 아래 여섯가구가 모여 사는 모양이 마치 마구간 같다 하여 '말집'이라고 불렸다.
 배검의 정치자금으로 만든 전재민촌. 한 지붕 아래 여섯가구가 모여 사는 모양이 마치 마구간 같다 하여 '말집'이라고 불렸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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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1898년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한다. 일제에 의해 수배자가 된 백범은 담양을 거쳐 지금의 광주 북구 우산동, 해남, 보성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백범은 48년 만에 '보은(報恩)의 여정'을 떠난다. 1946년 9월 광주를 비롯한 여수·순천, 보성·함평 등을 여행한 것이다. 

남도인들은 48년 만에 돌아온 백범을 뜨겁게 환영했다. 가는 곳마다 환영회가 열렸고, 만나는 사람마다 백범에게 후원금품을 내놓았다. 백범은 이 후원금품을 서민호 당시 광주시장에게 건네며 전재민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당시의 일을 백범은 <백범일지>에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곳에서 환영과 강연을 마친 후 보성을 떠나 광주까지 가는 사이에 환영은 이루 언급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역로마다 수많은 동포들이 대기·환영하니, 어떤 날은 3,4차를 경유한 적도 있었다. 이로부터 며칠 후 광주에 도착하여보니, 도처에서 동포들이 주는 각종 기념선물·해산물·육산물·금품 등을 종합한 것이 차에 가득 찼다. 광주에 전재민(戰災民)이 많다는 말을 듣고 시장을 초청하여, 다소간 전재민을 돕는데 보태어 쓰라고 부탁하여 주고 광주 환영회를 마쳤다."

서민호 광주시장은 백범이 받은 정치후원물품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지역 유지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흔쾌히 웃돈까지 얹어 건넸다. 마침내 그해 겨울 학동 천변 지금의 백화마을 주변에 전재민촌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공사는 1년여 동안 계속돼 전재민들은 1947년 겨울에 입주할 수 있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딸린 남루한 집이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옆집에서 소곤대는 귀엣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전재민촌이 한 지붕 아래 여섯 가구가 마치 마구간처럼 나란히 이어졌다며 '말집'이라 불렀다. 하지만 전재민들에겐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한 집이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전재민에 대한 백범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1946년 11월 3일자 <조선일보>는 광주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백범이 발표한 '식량문제와 전재민 원호에 대해 소신'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전재민중에도 약간의 재산가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절대다수가 아사와 동폐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세인은 언필칭 애국을 위하여 독립운동도 하고 근일에는 입법의원 경선에도 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전에 아사와 동폐에 빠지고 있는 절대다수의 동포가 죽은 뒤에 독립운동은 누구를 위하여 하며 입법은 누구를 위하여 하겠는가. 생각하면 모순이 너무도 크다. 그러므로 빈한한 동포를 구제하는 것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애국자가 되며, 독립운동자가 되는 시금석이다."

슬픈 역설이 광주천 따라 흐르고 있다
전재민촌 공동 우물터가 백범의 동포애를 품으며 아직까지 남아있다.
 전재민촌 공동 우물터가 백범의 동포애를 품으며 아직까지 남아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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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난 날 전재민촌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재개발을 앞둔 약 20여 가구의 오래되고 낡은 지붕과 빈 우물터, 공동 화장실만이 백범의 동포 사랑을 추억하고 있을 뿐. 그나마 백범의 동포애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기념공원과 '말집 유래 안내판' 등이 학동 백화아파트 옆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알맹이가 부족해 방문하는 이들의 아쉬움이 크다.

학동 백범 기념공원엔 선생이 직접 쓴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이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논어 계씨편에 나오는 공자가 한 말로 "나라를 책임진 사람과 가정의 가장은 적게 가진 것보다 모두가 고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민주화가 한국 사회 최고의 의제가 되었다. 경제민주화란 백범이 썼듯 "적게 가진 것보다 모두가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는" 마음과 자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백범이 세운 전재민촌 옆엔 학동 팔거리 흔적이 남아 있다. 학동 팔거리는 일제가 '어디에도 없는 이상촌'이라고 선전했던 곳이다. 한가운데 공터를 중심으로 여덟 갈래의 길이 방사선 형태로 뻗어나가는 것이 기하학적으로 반복돼서 팔거리란 명칭도 붙었다.

하지만 학동 팔거리는 이상촌이라기보다는 '원형감옥'에 가까웠다. 일제는 약 250세대의 주민들로 '갱생부락'을 구성하고, 주민들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했다. 일제에 우호적이었던 주민들에게 '방면위원'이라는 완장을 채워주고 다른 주민들을 감시하게 했다. 이들은 마을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파악해 일제에 보고했다.

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싸워온 백범이 제 동포를 살리겠다고 만든 전재민촌이 일제의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된 공간 바로 옆에 건설되었다는 것은 슬픈 역설이다. 슬픈 역설이 광주천을 따라 흐르고 있다.  

학동 백화아파트 옆에 만들어진 백범 기념공원. 학동 백화마을 전재민촌을 만들었던 백범의 뜻을 기리기엔 너무 형식적이고 초라한 공원이다.
 학동 백화아파트 옆에 만들어진 백범 기념공원. 학동 백화마을 전재민촌을 만들었던 백범의 뜻을 기리기엔 너무 형식적이고 초라한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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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는 사단법인 문화진흥협회와 오마이뉴스광주전라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캠페인입니다. 광주천 따라 걷기 2구간은 주남마을 - 방림교까지입니다.



태그:#광주천 따라걷기, #백범, #백화마을, #전재민촌,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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