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 여성작가 소설'을 읽었다. 나는 여기서 왜 그냥 '소설을 읽었다' 하지 않고 '한국', '여성작가'란 수식어를 굳이 붙이며 소설을 읽었다고 하는가. 우선 '한국'이란, 한동안 한국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문학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해왔다. 나 역시 그런 독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의 문학은 서사의 동력을 잃어버리면서 그 서사의 부재를 메워줄 힘을 얻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면서 낡은 것은 폐기처분되었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꼴이었다.
한때 한국 문학은 시대의 전위이자 체제의 저항군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창공에 떠 있는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희망에 부풀었던 때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모든 것이 체제 속에서 녹아내렸다. 정신은 파편화되고 이야기는 형해화되었다. 그 빈자리에 푸념과 고백과 투정만 남았다. 소설은 그들의 언어로서만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 즈음에 한국 문학의 토양은 산성화되었다.
다음으로 '여성작가'이다. 여성작가들은 굉장한 장점이 있다. 예민한 감수성과 언어의 마술적 감각은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것처럼 여성의 뇌의 언어영역이 남성보다 한 수 우위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성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늘 언어의 숲속에서 풍요로운 향연을 벌이다 온 느낌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질펀한 향연의 뒤 끝에 다가오는 허허로움. 촉촉하게 젖은 내면의 속삭임에 황홀하게 취하고, 그들과 함께 의식의 깊은 곳까지 유영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늘 자의식의 과잉에 시달렸다. 그것은 곧 현실의 외면으로 이어졌다. 여성작가의 마력은 그 주문에 취했을 때까지만 유효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한국문학을, 그리고 여성작가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한국 여성작가의 소설이 한 권 쥐여져 있다. 이 작품은 나의 편견을 일거에 불식시켜주었다.
내 편견을 깨뜨려준 '한국 여성작가 소설' 한 권김소윤 작가의 <코카브>는 이야기(서사)와 고백이 균형 잡힌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던가. 이야기가 흥하던 시대의 건조한 감수성과 고백이 넘치던 시대의 무기력한 주장(주제)이 작품에서는 반대의 길항으로 작용해 서로의 동력을 추진하고 있다. 즉 이야기가 고백을 이끄는 가운데 감수성이 윤활유처럼 흘러넘쳤고, 고백에 이야기가 입혀지면서도 주장은 억지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소설은 주인공(한형효)의 이 독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아내의 흔적에서 찾은 메모,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은 되돌아갈 수는 있다"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주인공과 아내(최은희)는 아이가 사고로 죽은 후 한 집에 살면서 별거 아닌 별거로 4년을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사라진다. 건설회사 과장인 주인공은 철거민 보상 문제로 골치 아픈 와중에 아내를 찾으러 떠난다. 아내의 과거로 여행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아내의 불행했던 시절이 드러난다. 과거를 추적하면서 아내가 '코카브'라는 이상한 단체에 소속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카브는 히브리어로 별을 뜻하며, 그 단체는 외계인과 교신을 하고 시간의 문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단체이다.
주인공은 기자 이강석과 함께 아내가 남긴 몇 가지 단서를 근거로 강원도 깊은 산중에 있는 코카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주인공은 코카브라는 단체에 점점 동화돼간다. 그곳은 삶의 패배자들이 모여 허황된 꿈을 꾸며 현실을 도피하는 곳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들끼리 서로를 치유하는 공간였던 것이다. 결국 코카브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의 문은 시공간의 변형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코카브>를 읽기 위해 피해야 할 '함정' 두 가지이 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몇 가지 피해야 할 함정이 있다. 첫째, 추리소설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내의 실종과 추적, 그리고 수상한 단체에 잠입. 소설은 이 과정에서 분명 추리적 요소가 도입되었지만 그것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가고자 하는 장치일 뿐이다. 여기서 추리적 요소만을 염두에 두고 반전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둘째는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은유와 환유의 장치이다. 작가는 어쩌면 이러한 장치들을 독자가 스스로 풀어나가길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코카브는 과학을 표방하면서 종교적 형태의 조직과 규율을 차용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점차 종교화되고 있는 과학을 은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믿음이란 또 다른 자기방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회의에 젖기 마련이다. 또한 아내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가, 나아가 독자의 과거가 오버랩되고, 결국 우리 모두의 현재는 과거라는 상처에서 돋아난 새살이라는 환유가 저절로 피어오른다. 이 과정에서 자칫하면 오독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를 선택하기보다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나 사회적으로 용인된 질서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자유는 책임이 따르고 그것은 비용으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그 비용이 싫어서 상투적이고 단순한 프로그램에 동화되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읽었다. 아내가 소속한 코카브의 현혹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군상들이 자유를 반납하는 곳이고 주인공은 이를 고발하는 투사로 나서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다.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은 코카브에 동화되면서 이제 작품은 치유여행으로 바뀐다. 그리고 치유는 은폐가 아닌 직시(直視)로 해결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온갖 향락과 소비만이 상처를 덮어주고 핥아주리라고 생각한다.
힐링도 상품으로 전유되는 이 시대에 상처의 원인을 직시하며 파헤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내면은 어떤 의식적인 행위로 움직일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결국엔 그 갈등과 직면해 해결해야 하는 것도 인간이 가진 의지라는 것도"(p.255)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치유의 길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 길을 잃지 않고 따라 오는 여정이 이 작품의 최종 은유이자 환유이다. 에코 식으로 표현하자면 메타프노미인 것이다.
읽는 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천의 얼굴'의 소설끝으로 문체다. 작품에서 문체는 간결하지만 웅숭깊다. 즉 간결한 문체 속에서도 울림이 깊은 문장이 곳곳에서 부비트랩처럼 터지곤 한다. 그래서 빨리 갈 수 없다. 예컨대 "유일하게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신뿐이었다"(p.70)처럼 아들의 사고로 인한 회한과 회의는 이 한 문장에 다 들어가게 된다. 지나치기 쉽지만 음미하면 의미가 새록새록 솟아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속도감에 취해 자칫하면 빨리 달려 지나칠 수 있다. 속도감이 오히려 문체의 미학을 갉아먹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독의 함정을 피했을 때 이 작품의 진가는 훨씬 다양하고도 묵직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근원적 상처를 그려내는 전통적인 소설적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의 어리석음을 밀도 있게 취재한 다큐멘터리, 혹은 부조리와 무지를 고발하는 르포처럼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다시 한번 간추리면 이 작품을 추리로 읽으면 단선적이고 내면의 고백으로만 읽으면 평면적이다. 시작은 추리이되 과정은 내면의 고백, 마무리는 사회성 짙은 고발로 읽는 입체적인 독법을 요구하는 것이 작품 <코카브>의 특징이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읽힐 때 이 작품은 천의 얼굴로 다가온다.
힐링이 화두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작가는 집요하게 상처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아픔을 동반하지만 결국 아프지 않고는 치유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해주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에 UFO가 떠나고 나서 주인공과 아내는 재결합한다. 이 작품에서 UFO는 흔히 생각하는 외계인들이 탄 비행체가 아니다. 희망의 은유라고 불러도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UFO는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치는 자에겐.
필자는 이제 다시 '한국 여성작가 소설'에 눈을 돌릴 예정이다. 그리고 그 공은 순전히 김소윤 작가에게 있다.
덧붙이는 글 | <코카브> 김소윤 씀, 자음과모음 펴냄, 2012년 12월, 303쪽,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