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의 취업준비생 철수. 그는 학벌, 집안, 외모 무엇 하나 뛰어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평범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서는 늘 그에게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철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한다.
취업시에는 면접을 보러간 회사로부터 부족한 스펙을 지적당하고, 연애를 할 때에는 여자친구가 그의 실수로 오해하여 화를 낸다. 집안에서는 잘난 것 없는 동생이자 아들로 전혀 이쁨받지 못하는 찬밥신세다.
그럴 때마다 철수는 좌절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하고.
전석순의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는 그런 주인공 철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본문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기 보다는, 가전제품을 구입했을 때 흔히 들어있을 법한 '사용설명서'의 형식을 빌려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대 평범한 청년 '철수'의 끊임없는 반품 사례<철수 사용 설명서>는 크게 세 종류의 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철수를 가전제품처럼 묘사하면서 규격·사용법·주의사항 등을 적어놓은 '사용설명서', 철수의 여자친구·면접관·가족의 시점에서 바라본 철수에 대한 '반품신청서' 그리고 철수의 시점에서 적어내려간 그의 '심정'이 바로 그것이다.
제품명 : '철수', 성별 : 남자, 나이 : 29세, 신장 : 173cm, 몸무게 : 65kg, 학력 : 지방 국립대졸.(본문 중에서)글의 문체는 간결하다. 먼저 제품 철수의 정보에 대한 설명서가 쓰여있고, 그 뒤에는 취업모드·학습모드·연애모드·가족모드의 4가지 상황에서 그가 보여주는 행동이 뒤따른다. 그리고는 입사를 위해 찾아간 회사와 여자친구, 가족이 보여주는 반응들을 '반품신청서'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렇다. 모두 철수가 불량품이라며 반품을 요구하고,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한다. 학벌과 스펙이 낮다고, 데이트할 때 좀 더 로맨틱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혹은 엄마 친구 아들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는 점 때문에 철수는 매번 '오작동만 일으키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제품' 취급 당한다.
하지만 늘 반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가고, 이에 철수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자신이 정말 어딘가 잘못된건가 싶어서 걱정하고, 어느샌가 붙은 불량품 딱지를 떼어버리기 위해서 노력해보지만 그는 여전히 철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답답한 존재로 치부되지만, 그는 제품이 아닌 사람이기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 사람을 가전제품처럼 규격화하는 요즘 세태를 비꼬다이 책은 철수의 사용설명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청춘들에 대한 설명서이기도 하다. 평범한 대학을 졸업한 특징없는 외모와 재산을 소유한 주인공. 심지어 이름까지도, 한때 대한민국 이름 중 가장 흔했다던 '철수'다.
본문을 읽다보면, 사용설명서를 통해 한 사람을 묘사하고 사람들의 평가를 덧붙이는 형식은 꽤 특이하고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중간쯤 읽다보면 철수의 이야기가 슬퍼지고, 그의 이야기가 곧 우리네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살다보면, 우리 사회는 키, 학벌, 스펙, 연봉처럼 상당한 부분에 있어서 개인을 숫자와 조건들로 평가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씩 철수는 사람들이 망가진 제품을 만나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은 상대적으로 정상이 될 수 있으니까.(본문 중에서)이 책을 읽으면서, 매 상황마다 부족함을 드러내거나 우스꽝스럽게 실수를 하는 철수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보기에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철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또는 자신보다 더욱 못난 철수를 보며 자그마한 우월감을 느끼거나.
우리 사회의 과열된 경쟁의식은 어쩌면 그런 생존본능이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표출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경쟁의식 때문에, 오늘날 점점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가치가 변질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간혹 반품이나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제품 자체의 변질이라기 보다, 사용자의 변심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고객 센터로 연락하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본문 중에서)<철수 사용 설명서>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참신한 구성으로, 사람들을 제품으로 취급하며 규격화하는 사회를 꼬집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같은 광고문구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이 '효율성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세태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세상에 어느 가전제품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으로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의 젊은날에 방황을 겪으며 성장한 철수가 마지막 즈음에 내뱉은 한 마디는, 이런 현실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작은 해답을 던져주는 듯하다.
"사실 모두가 비정상이니 결국 모두가 정상인 셈이다. 철수는 누구에게나 온전해질 수 있다. 더는 수리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벌써 전원 코드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본문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철수 사용 설명서>(전석순 씀 | 민음사 | 2011.07. |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