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박종흥이 자기 동네 아이들과 '논틈못'에 헤엄을 치러 갔다. 그때 우리는 헤엄을 치는 것을 목욕하러 간다고 했다. 아무튼, 못에서 헤엄을 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박종흥이 감자에 거머리가 몇 마리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박종흥은 그것도 모르고 감자를 덜렁거리며 나오다가 동무들이 모두 "야. 니 불알에 거머리 붙었다!" 해서 기겁을 하고 거머리를 떼어 냈다. 그 뒤로 박종흥이는 감자에 거머리가 조롱조롱 붙었던 아이라는 뜻에서 조롱이라는 말을 되게 소리 내어 쪼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 296쪽<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의 저자 김태완이 고향 동무인 박종흥의 별명이 '쪼로이(쪼롱이)가 된 내력(?)을 소개하는 글이다.
'짤짜리'처럼 짜릿하고 '호디기 소리' 같은 추억 담겨 있어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옛날 맛'이라던 가 '어머니 손맛'이라고 음식 맛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연령과 성장배경에 따라 유독 입에 잘 맞는 맛은 분명히 있다.
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중년 이상의 나이, 학교에서는 '짤짜리'를 하고 봄이 오면 버들가지를 비틀어 '호디기'를 만들어 불었던 세대의 사람들이 읽으면 '옛날 맛', 추억을 뒤적이게 하는 '고향 맛'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바로 내 추억, 어렸을 적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 같아 맞장구를 치느라 연실 '맞아, 맞아' 하며 읽게 될 거라 장담한다.
김태완 지음, 도서출판 호미 출판의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은 사계절을 머금고 있는 56편의 한시(漢詩)에 저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장식처럼 덧대 꾸렸다. 주렁주렁 달린 감을 떠올리게 하는 가을 편에 18수, 북풍한설과 설경을 연상시키는 겨울 편에 13수, 아지랑이처럼 버들피리 소리가 아른거리는 봄 편에 17수, 뙤약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여름 편에 8수의 한시가 골고루 나뉘어 담겼다.
저자가 살아온 50년 동안 더듬고 기억과 추억으로 숙성시켰을 사계절, 봄·여름·가을·겨울에 담긴,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글들이 휘휘 돌리던 망우리 깡통처럼 뜨겁고, 가마솥에서 끓고 있던 쇠죽 냄새처럼 구수한 필체다.
조선 3대 태종은 셋째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세종 4년에 죽는다. 태종 말년에는 해마다 가뭄이 극심하였다. 태종은 가뭄에 원한이 사무쳐서 죽음에 임하여서는 "지금 가뭄이 이토록 심한데, 내가 죽은 뒤에라도 넋이 있다면 반드시 이날에는 비가 내리게끔 하겠다"고 유언하기까지 하였다. 그 탓인지 몰라도 그해 큰 풍년이 들었고, 그 뒤로 태종의 제삿날인 음력 5월 10일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려서 이를 '태종우(태종우)라고 하였다. -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 193쪽번역한 글을 싣고 한시 원문도 실렸다. 한시를 쓴 저자를 소개하고, 시구(詩句)에 담긴 의미, 뒷담화처럼 자구(字句)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숨은 내막들을 술술 풀어놓았다.
홍삼절편처럼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해 한시가 6년 근 수삼과 같다고 한다면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에 담긴 글들은 6년 근 수삼으로 만든 홍삼절편, 말랑말랑하면서도 달달한 홍삼절편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6년 근 수삼이 좋다는 건 다 알지만 우걱우걱 씹어 먹기엔 많이 쓰다.
한시가 그렇다. 내용이 좋아도 읽고 해석하기에 벅차니 재미를 느낄 겨를이 없다. 이런 한시를 홍삼절편을 찌듯 해석해 놓고, 쪄낸 홍삼을 꿀에 버무리듯 달콤한 이야기들을 곁들여 놨으니 쌉싸래한 인삼맛과 추억의 달콤함이 어우러진다. 먹는 줄 모르게 읽고, 읽는 줄 모르게 또 읽게 된다.
버들가지 잎사귀 무성해질 때면, 멧새, 참새, 온갖 자그마한 텃새들도 남아들어 가지 사이를 들락거리며 짝을 찾고, 아이들은 버들가지에 물오르면 가지를 꺾어 틀어서 호드기를 분다. 맞춤한 가지를 꺾어서 아래위를 잡고 손을 어긋나게 틀면 나무 부분과 껍질이 서로 떨어진다. 너무 힘을 주면 껍질이 갈라 터지고 힘을 조금 주면 아예 비틀어지지 않기 때문에 알맞게 힘을 주는 것이 요령이다. 버들가지 몇 개를 버리고 나면 제법 요령이 생긴다. 그런 다음 적당한 길이로 칼집을 내고서 가지를 쏙 잡아 빼면 껍질만 대롱처럼 남는다. 그 한끝을 칼로 살짝 저며서 겉껍질을 벗겨 내고 이로 잘근잘근 물어서 납작하게 한 다음 불면 피리소리가 난다. -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 213쪽딱 내 어릴 적 이야기이고 추억의 조각들이다. 이백의 시 '자야의 노래(子夜吳歌)'에서는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고, 이달이 지은 '대추서리'에서는 대추서리를 하던 악동 시절이 떠오른다. 떨어진 소나무 잎을 긁어모으던 일도 생각나게 하고, 선생님 몰래 동전 따먹기를 하던 '짤짜리'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더듬어가는 추억에 한시가 녹아든다. 뽕나무 잎을 갉아 먹던 누에처럼 아주 작지만 바스락거리는 커다란 공명으로 웅웅 울린다. 추억은 더듬다 보면 어느새 귀촌을 꿈꾸게 한다. 퇴계가 그러했듯이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노후를 꿈꾸게 하니 추억은 동색이 되고, 다가오는 내일은 초가를 덮고 있는 이엉만큼이나 푸근하기만 하다.
'쪼롱이' 이야기를 키득거리며 읽으니 국어교사인 큰딸이 '아빠! 무슨 책인데 그렇게 웃으면서 봐요?' 하고 묻는다.
'딸아! 네가 이 맛을 알랴. 이 맛이 추억 맛이고, '옛날 맛'이자 '어머니의 손맛'같은 고향의 맛인 것을.' 10년 후쯤, 음모를 꾸미듯 계획하고 있는 노후가 실현된다면 귀촌해 사는 황토집에서 이 책, 김태완 지음, 고서출판 호미 출판의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에 나오는 주인공은 더 이상 추억 속의 내가 아니라 노후를 보내고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중년 이상의 나이, 학교에서는 '짤짜리'를 하고 봄이 오면 버들가지를 비틀어 '호디기'를 만들어 불었던 세대의 사람이라면 분명 노후의 삶으로 꿈꾸게 될 만큼 목가적이고 서정적이다
호드기를 불듯 읊어보는 한시(漢詩)물오른 가지를 막 벗겨서 만든 호드기를 불듯 김극기의 시 '농촌의 네 계절(田家四時)'을 입속에서나마 우물우물 읊고 또 읊어 본다.
농촌의 네 계절(田家四時)들판에는 버드나무 한창 그늘 짙고언덕에는 뽕나무 잎 드문드문 남았네.까투리는 새끼 치느라 여위어 가는데누에는 섶 오르느라 살이 쪘다.훈훈한 바람은 보리밭에 일렁이고으슽한 비는 이끼 낀 냇가에 자욱하여라.적막한 집에는 찾는 양반 없어서냇가 사립문이 대낮에도 닫혔다.柳郊陰正密 桑塢葉初稀稚爲哺雛瘦 蠶臨成繭肥薰風驚麥壟 凍雨暗苔磯寂寞無軒騎 溪頭晝掩扉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 280쪽- 덧붙이는 글 |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지은이 김태완┃펴낸곳 도서출판 호미┃2012.12.30┃값 1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