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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피에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에타> 포스터
 <피에타> 포스터
ⓒ 김기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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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엄마는 물론 단 한 사람의 가족도 없다. 그는 사채업자를 대신해서 돈을 받아내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채무자들을 상해보험에 가입시키고, 손가락을 자르거나 다리를 부러뜨려서 보험금을 타내는 잔인한 방법으로. 영화 <피에타>의 주인공 이강도 얘기다. 그런 어느 날 그에게 자신이 엄마라 주장하는 여인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울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를 버려서 미안해... 엄마는 너무 어렸고 겁이 나서 너를 낳자마자 병원에 버렸어."

이 한 마디 외에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강도의 생모임을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아기를 낳고 버린 자세한 과정이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강도나 관객들은, 그 말 한 마디에 그녀가 그의 생모임을 덥석 믿고,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물론 그녀는 극단적인 몸짓으로 진심을 표현하긴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몸짓일 뿐 설명은 아니다. 결국 '겁이 나서 너를 낳자마자 버렸다'는 한 마디의 설득력이 그만큼 큰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미혼모들의 처지와 심정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그녀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죽음과 맞먹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혼모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구체적 실체는 무엇일까?

2011년 <서울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된 기사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남녀 고교생 2명이 몰래 아이를 낳은 뒤 살해하고 시신을 화단에 버렸다가 1년 만에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고교생인 이들은 아이를 낳았다고 부모에게 혼나는 것이 두려워 영아를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A양은 지난해 5월 1일 오전 6시쯤 대전 중구 자신의 집에서 여자아이를 출산한 뒤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시신은 아기의 아버지인 B군이 집 근처 화단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 2011년 5월 12일자 서울신문)

'충분한 경제적 지원만 하면 미혼모는 아이를 기를 것이므로 입양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모든 어미에게는 본능적 모성애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례는 매우 특수한 경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한국에서는 출산 아동의 1.6%가 미혼모에게서 태어난다. 한국의 미혼모 출산이 이같이 적은 것은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정부의 지원이 없어서이다. 최근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미혼모를 음란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혼모다>, 물푸레복지재단, 연두출판사

위의 책은 미혼모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것으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들고 있다. 위 책에 의하면 미혼모들은 설령 국가적인 지원이 있다하더라도 동사무소에 가서 지원 상담을 받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 한국사회에서 미혼모에 대한 멸시와 냉대는 '경제적 고통'보다 훨씬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자살하는 학생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착취 당하고 차별 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례들 역시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른 것'을 용인하지 못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겁이 났다'는 미혼모의 고백은, 아이를 길러낼 수 있는 경제적 현실적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미혼모 개인을 매장시키는 타인들의 편견과 따가운 시선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말해 준다.

다시 위의 신문 기사를 보자. 두 남녀 고등학생의 잘못은 무엇인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마련된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성관계를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인가? 아니면, 신성한 결혼제도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성관계를 미혼의 10대가 했기 때문인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부도덕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첫 섹스의 평균 연령은 대략 16세 전후라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만 14세 줄리엣은 로미오를 만난 첫날 첫 섹스를 했고, 16세 춘향과 이몽룡도 만난 첫날밤을 함께 보낸다. 적어도 줄리엣이나 춘향을 불결하다 비난하지 않고, 두 작품이 훌륭한 문학이라 인정한다면, 미혼모나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지나친 사회적 냉대와 경멸이 문제있는 게 아닌지 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아닐까?

미혼모에 대한 편견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결국, '신성 가족의 품 안에서의 성관계와 출산만이 축복받을 만한 것이고, 그 이외의 출산은 수치이고 사회적 일탈이며 불결함'이라는 의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미혼모들의 고통과 공포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제도적 뒷받침의 부재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그런 편견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 편견은 '경제적으로 독립한 양성부모와 혈연관계에 있는 자녀로 구성된 가정만이 정상가정'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다.

만약 저 두 남녀 고등학생이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자. 그들이 마주치게 될 현실은 어떨까? 그 고통은 단순히 살 집이 없고, 분유 살 돈이 없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각자 원가족에게 의절에 가까운 심한 모욕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매장에 가까운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학업도 계속해나가기 힘들다. 최근까지 임신을 이유로 퇴학시키는 학교들이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통이 단순히 10대에서 끝날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20대 청춘의 삶의 전망은 혼탁하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학벌에 대한 편견 등등 아이를 낳지 않고도 감당하기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20대를 '일자리, 소득, 집, 사랑과 결혼, 아기, 희망을 가질 수 없다' 하여 '6무 세대'라 하겠는가?

미혼모가 자신의 자녀를 기를 수 없는 현실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편견을 깨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많아져야 하고, 미혼모를 위한 국가와 시민 사회의 지원도 아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생명의 탄생이든 그것은 고귀하고, 모든 미혼모는 원한다면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의 열악한 현실 속에서, 그 누구도 아이를 버린 미혼모를, 심지어는 그 아이를 살해한 미혼모까지도 쉽사리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얻었고, 해외입양인들 가운데는 인종차별이나 양부모의 학대,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고통을 겪은 경우가 많다.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현대사의 일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위에서 얘기했던 미혼모에 대한 한국사회의 깊고 어두운 편견이 한몫했을 것이다.

최근 고통을 겪었던 해외 입양인들을 중심으로 '해외 입양' 뿐 아닌 '입양' 자체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이런 목소리에 힘을 얻어 해외 입양을 극히 제한하고, 생모에게 최대한 양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입양을 좀더 까다롭게 심사하도록 입양법이 개정되었다. 개정된 입양법에 따르면, 입양을 위해서 아기는 미혼모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라야 하며, 입양부모와 생부모는 법원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입양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정신과의 진단서, 알콜중독자가 아니라는 확인서 등등 수많은 서류를 구비해야 한다.

늦었지만, 미혼모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양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커지기 시작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미혼모와 그 아기들에게 이런 법 개정이 정말 반가운 선물일까? 겁이 나서 아기를 버리는 한국의 미혼모, 경제적인 막막함보다 원가족으로부터의 냉대와 박해, 사회적 매장의 죽음과도 같은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미혼모에게 당신의 아기를 입양보내기 위해, 10대 어머니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려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미혼모가 이에 동의하고 법원의 심사에 기꺼이 응할까? 이 법은 사실상 입양 금지법이다.

다시 <피에타>로 돌아가자. 입양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홀로 시설에서 자라 자립금 300만 원을 받아 열여덟에 독립했을 이강도의 불행은, 자신의 불행마저 느끼거나 연민할 수 없는 정도의 '순도 100%의 불행'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야기는 극히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입양의 기회도 잃고 시설에서 자란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약자 중의 약자'이기 때문이다. 자칫 이런 시설퇴소인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불우한지를 얘기하는 것조차 그들의 앞날에 또다른 편견을 심어주는 길이기에, 자신들의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이들을 얘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피에타>를 말하는 것은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엄마라고 주장하던 그 여인은 사실은 엄마가 아니었다. 가족을 모르는 이강도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을 알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극한의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 나타난 여인이었다. 이 모든 게 그녀의 복수극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강도가 보는 앞에서 죽는다. 그런데 죽기 직전 그녀는 괴로워한다. 거짓으로나마 맺었던 모자관계에서 연민이, 모성적 사랑이 생겨난 것이다. 그 여인은 말한다. "강도도 불쌍해."

경제적 제도적 지원의 부재보다 미혼모들을 괴롭히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이고, 그 편견의 뿌리는 혼인과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다. 모든 소수자의 고통은 사회적 편견, 다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온다. '혼인'만이 정상적 '출산'의 조건이라는 가족주의가 미혼모의 고통의 뿌리라면, 그 가족주의를 떠받치는 것은 '혈연'이다. 입양아도 손가락질 받는 사회에서 미혼모가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하루하루가 목숨을 건 투쟁이다.

미혼모와 그의 아이가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을 찾기 위해 그런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이혼가정, 미혼모자 가정, 비혼 가정, 동성애자 가정, 입양 가정과 같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가정 형태를 인정하고 지원할 때 편견은 깨진다.

복수의 대상이었던 이강도와 어미자식 관계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엄마라 주장했던 여인의 가슴 속에는 연민이 차올랐다. 모성애는 혈연이라는 신비로운 마법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모자관계는 혈연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단지, 세상에 던져진 아기들은 돌봄이 필요하고, 그 돌봄이 가능한 어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양육은 가능하다.

미혼모가 소수자로 박해받는 동안, 입양 가정도 한국의 혈연 중심의 배타적 가족주의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입양 가족은 정상가족으로 여겨지지 않기에, 절대다수의 입양 부모는 '공개입양'보다는 '비밀입양'을 택한다. 또 입양을 결심한 부부는 흔히 '나 죽고 나서 하라'는 양가부모의 결사반대에 부닥친다. 그리고 미혼모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한국 사회에서 입양 가정이 겪는 고통과 그 뿌리가 같다. 입양아들이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성장하고, 입양 사실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회라면, 미혼모를 바라보는 시선도 보다 유연해진다. 그래서 입양의 활성화는 미혼모에 대한 편견도 녹인다. 낳았으니 책임지라 하기에는 이 사회에서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약자이다.

입양을 어렵게 하면 미혼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돌볼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 아래 입양법이 개정되었다. 미혼모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기 이름을 올리고, 길고 복잡한 재판 과정을 거쳐야만 입양을 하도록 함으로써, 폐쇄적 가족주의로 가뜩이나 설 자리가 없었던 입양의 길은 거의 막히다시피 했다. 사회적 편견을 넘어서리만치 미혼모의 모성애가 강한 것이었다면, 까다로운 입양절차를 마련하고 입양을 되도록 어렵게 하는 법률이 생기지 않았을 때도 자신의 아이를 기르겠다고 결정하는 미혼모들이 많았어야 했다. 혹시나 생모가 길러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애착관계를 형성할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절대적 돌봄이 필요한 생애 첫 1년을 이 사람 저 사람 품으로 떠돌며 기다리도록 한다 해서, 다시 마음을 바꾼 미혼모의 품에서 자라게 될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 결과는 지금 영아 보육 시설에서 나타나고 있다. 입양 못 간 아이들이 시설에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두려움에 가득 차 아기를 유기하는 미혼모들을 위한 제도 개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혼모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기 이름을 올려도 입양 가면 지워지기에 괜찮다는 것은 절반의 사실을 숨긴 거짓말이다. 현실적으로 입양 대기 아동 중 입양을 못 가는 아이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입양을 못 가게 되면, 그 아기의 기록은 미혼모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영원히 남는다.

누구나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치유의 힘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해외입양인들의 고통에 공감할 때, 한편으로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강도와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영화 <피에타>를 보면서 나는 물었다. 과연 피는 정말로 물보다 진한가?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되었다. '피'가 아니면 모두 '물'이라 할 수 있을까? 생모의 혈관에만 피가 흐르는 게 아니다. 만인의 몸속에는 '피'가 흐르고, 평론가 김윤식의 말대로 모든 '피'는 동일하다.

덧붙이는 글 | 2월 임시국회에서 백재현 의원이 입양특례법 재개정을 위해 '코제트법'(레미제라블)을 발의할 예정입니다. 이에 적극 찬성하면서 최근 소라미변호사 및 김도연 목사, 해외 입양인들이 미혼모 문제와 입양 문제를 대척점에 두고 법 재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에 문제점을 지적한 글입니다.



태그:#입양특례법, #미혼모, #피에타, #베이비박스, #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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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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