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법판결에 따른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현대차 울산공장 앞 송전철탑 위에서 112일째 농성중인 현대차 비정규직 최병승씨. 회사측이 그의 대법원 승소 판결을 개인소송으로 치부하자 비정규직 2000여명이 집단소송을 벌이고 있다
 대법판결에 따른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현대차 울산공장 앞 송전철탑 위에서 112일째 농성중인 현대차 비정규직 최병승씨. 회사측이 그의 대법원 승소 판결을 개인소송으로 치부하자 비정규직 2000여명이 집단소송을 벌이고 있다
ⓒ 박석철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주나 한 잔 하자"는 그의 말에 선듯 약속을 잡았다. 평소 의협심이 있는 후배인지라 늘 눈여겨 봐왔다. 좋은 일자리 마다하고 어려운 곳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모처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후배가 불쑥 현대차 비정규직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해는 하는데…"라고 전제한 후 "그들보다 더 열악하고 억울한 노동자들이 많은데…. 철탑농성을 끝내지 않고 정규직화 주장만 계속하는 것이 너무 과하다"고 털어났다.

후배의 말인즉슨, 자기 후배가 한 업체의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되었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더란다. 그래도 현대차 비정규직은 다른 비정규직에 비해 임금이 더 많고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많지 않느냐,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그런 식의 말이었다.

평소 생각해오던 그의 이미지와는 다른 말이라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10일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그와 맞물려 10여년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오랜 기간 차별에 시달려 온 현대차 비정규직

울산 동구에 이사온 지가 벌써 17년이나 됐다. 당시는 울산이 광역시가 되기 전이었고, 지금은 북구 소속이지만 당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동구 소속이었다. 동구에 있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차동차 두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10만명 가까이 되는데 놀랐다. 정규직, 비정규직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1997년 울산이 광역시가 되면서 현대중공업은 동구에 여전히 남고, 현대자동차는 북구에 소속됐다.

월드컵올림픽이 열리던 2002년으로 기억한다. 지역일간지에서 해고된 나는 선배의 소개로 교육전문지인 <00교육신문> 창간멤버로 들어가 편집국장일을 맡았다. 신문사가 현대자동차 울산4공장 문앞에 있었는데, 집에서 아침을 못 먹고 출근하는 날이면 신문사 건물 1층에 있는 순대국밥집을 찾았다.

그 해 여름 아침으로 기억한다. 순대국밥집에는 야간을 마치고 나온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두 테이블에 나뉘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 '후닥닥' 하더니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것이 아닌가. 싸움은 주변의 만류로 10여분 만에 끝났지만 큰 소동이 벌어졌다. 주인은 종종 보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이 돌아간 후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니, 한쪽 팀은 직영(정규직), 한쪽팀은 하청(비정규직)이라고 했다. 서로 말다툼을 하더니 갑자기 싸우더라는 것이다. 주인은 "아마 그동안 일하면서 쌓인 감정이 많았는가 보다"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싸웠던 비정규직 노동자 한 명은 하청업체에서 해고됐다고 한다. 주인의 말을 빌리자면 싸우면서 얼굴에 상처가 난 정규직 노동자가 화가 나서 하청업체 사장에게 "잘라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고난 후 현대차 내부에서 불거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문제가 이해가 됐다.

당시 현대차 비정규직의 고용은 상당히 불안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은 둘째치고, 비록 몇년 전부터 비정규직에게도 지급된다지만 정규직이 받는 성과급이 비정규직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특히 싸움의 발단이 됐듯, 일하는 현장에서의 차별도 심했던 것 같다.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문제는 가족에게도 이어졌다. 당시 <00교육신문>은 주간지라 독자들에게 매주 우편으로 신문을 발송했는데, 그 수가 만만찮았다. 기자들이 신문발송에 매달리면 하루 일을 종치기 때문에 식당 주인에게 부탁해 이웃 아줌마들을 신문 발송작업 아르바이트로 고용했다. 5명의 아줌마들에게 들어가는 비용 10만 원이 기자들이 하루종일 매달리는 것보다 효용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신문을 접어 비닐봉투에 넣는 일을 하는 아줌마 5명은 항상 3대 2대로 나눠 각각 작업을 했다. 서로 말도 잘 하지 않았고, 서로 어색해 했다. 알고 보니 3명은 현대차 정규직, 2명은 현대차 비정규직의 아내였다. 그날 아침 식당에서 목격한 싸움 탓에 아줌마들의 어색함 또한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비정규직 차별은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 현대차와 견주면 안돼

후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현대차 비정규직의 임금이 다른 업체 비정규직과 비교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여긴다. 나도 처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이 받는 시급은 생각보다 낮았다. 매일 12시간씩 주야간 맞교대, 휴일도 없이 일해야 손에 받아쥐는 돈이다.

단순 비교해, 후배처럼 하루 8시간 일하고 쉬는날 다 쉰다면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받는 임금은 어떨까? 특히 같은 현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에 비해 차이가 나는 상대적 박탈감은 심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비정규직들은 막강한 정규직노조를 그저 부러워할 뿐이었다. 그때는 해마다 현대차노조 파업이 언론을 장식했다. 비정규직들은 노조가 없어 억울한 일이 있어도 단체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사장이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것이 현대차 비정규직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도 용기를 내서 노조를 만들자고 한 사람이 있었나 보다. 2003년 현대차 비정규직노조가 생겼다. 그들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차별이 심한 것에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노동부에 고발하자 노동부는 2004년 현대차 대부분 공정을 불법파견으로 판정했다.

하지만 노동부 판정은 해결점이 아니라 문제의 시작이었다. 노조를 만든 사람들은 해고되고 감옥에 갔다.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도 소용이 없었던 것. 그들은 다시 법에 호소했다. 하지만 모든 법원이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발생했다. 비정규직들이 지쳐갈 때쯤인 2010년, 대법원이 지금까지의 판결을 모두 뒤엎고 파기환송한 것이다. 급기야 대법원은 2012년 현대차 불법파견 확정판결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대법 판결 후 현대차 비정규직들에게 돌아온 것은 수백명의 해고와 수백 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였다. 8년간 대표소송을 한 최병승 조합원은 112일째 철탑에서 여전히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회사측의 어깃장으로 다시 비정규직 조합원 2000여명은 민변의 도움을 받아 집단소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생산 라인이 최병승씨 혼자 일하는 곳이 아닌만큼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최병승씨와 똑같은 승소판결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회사 측이 항소 항고 한다면 이들도 8년을 기다려야 한다.

후배의 말처럼 이 사회 곳곳에서 비정규직들은 차별받고 억울한 일을 겪고 있다. 하지만 대항하는 비정규직에게 돌아오는 것은 해고다. 우리 사회가 하루속히 풀어야할 과제다. 이 문제를 '현대차 비정규직은?'이라고 대별하면 안 된다.

지금은 현대차 비정규직이 다른 업체 비정규직보다 낫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야 다른 비정규직 문제도 풀릴 거라 생각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현대차 비정규직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