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겨울방학. 여느 고등학생들에겐 고3 입시생활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다. 이렇게 공부하기도 바쁜 와중에,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한다'는 도전적인 주제를 내걸고 당당히 포럼을 여는 이들이 있다. 바로 고등학생 인문 비평 공동체 IRIS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스펙에 반(反)하는 학생들의 자발적 단체를 꿈꿨다는 IRIS. 입시에 치이는 고등학생들의 현실 속에서 이런 발칙한(?) 단체를 자발적으로 결성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IRIS 공동체를 기획한 서라벌고 2학년 강태영 군을 노원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문학과 정치철학에 뜻 같이하는 친구들과 시작"
- 이름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IRIS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요?"정신분석학자 라캉의 ISR에서 모티브를 얻고 이 세 가지 알파벳에 저희 단체가 지향하는 가치 4개를 적용해 보았어요. 공정 (Impartial), 정의 (Righteous), 이상 (Ideal), 사회 (Social)의 앞 글자를 따 'IRIS'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전국적인 단위로 인문학과 정치철학에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운영 중인 교내 동아리를 바탕으로 전국적 단위의 연합체 형식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친구부터 지인에게 소개 받은 친구, 외부 행사에서 만난 친구들을 섭외하고, 그렇게 모이다 보니 전국 각지의 여섯 학교 (서라벌고, 선덕고, 창현고, 북일여고, 민족사관고, 지구촌고)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멤버를 섭외할 때 특별한 기준은 없었나요?"특목고 위주의 일방적 선정은 배제했습니다. UHEC(전국고교생경제연합동아리)이나 YUPAD(전국고교생정치외교연합동아리) 같은 경우는 거의 외고생, 자사고생들만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들만의 리그'로는 흘러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명문고이냐의 여부는 철저히 배제하고, 일반계고, 특목고, 대안학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스펙만을 위하는 친구들이 아닌 진짜 관심 있고 열정 있는 멤버들을 섭외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단순히 지식의 수준이 높다고 해서 섭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이 뛰어나도 인문학을 대입 논술용 스킬이나 일종의 지적 패션처럼 이용하는 친구라면 곤란하죠.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의 도구로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로 IRIS를 구성했습니다."
- 참여하고 있는 총인원은 몇 명쯤 됩니까?"초기에는 완전한 연합동아리 형식이었지만 현재는 연합체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개방형 공동체이기 때문에 구체적 인원을 이야기 하긴 조금 애매해요. 멤버 학교들 인원을 모두 합치면 60명쯤 됩니다. 초창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친구들 10명은 운영진을 맡고 있습니다."
- 운영진들은 주로 무슨 일을 하나요?"보통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기획 회의를 합니다. 요즘은 포럼을 앞두고 있어서 보름에 한 번은 만나는 것 같습니다. 회의하면서 운영진끼리 따로 직책을 세분화 하지는 않았어요. 서로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의사결정권을 가지며, 자유롭게 제안하고 발언합니다. 그렇게 프로젝트도 구성하고 필요할 땐 외부 자문을 구하거나 도움 주시는 선생님들께 강의도 들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 그럼 지금까지 IRIS가 해왔던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 있나요?"맨 처음에는 잡지를 기획했어요. 부산의 인문학 서원 인디고(INDIGO)의 계간지 발행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다만 내용 면에서는 지나치게 '행복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만을 다루는 인디고와는 달리 우리는 비판적 사회 비평과 함께 문화 비평을 다루는 잡지를 만들자고 이야기가 모아졌습니다. 출간 비용과 관련해서는 후원사를 찾아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UHEC은 전경련으로부터, 인디고는 부산 저축은행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발행하는 잡지에서 정말로 자유로운 발언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 후원사가 아무리 선의의 목적으로 후원해 주더라도 저희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될 가능성이 있더군요.
그래서 비용 없이도 발행할 수 있는 블로그진(blogzine)의 형태를 기획했습니다. 공동계정 블로그를 열고 그 곳에 주기적으로 칼럼을 게시하는 형태죠. 하지만 블로그진에서 공유될 수 있는 담론은 계급적 성향의 '학생성' 보다는 보다 보편적이고 전반적인 사회 비평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핵심 테마인 학생성을 이상 사회라는 대주제 하에서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오프라인 포럼을 기획했습니다. 장소는 딴지일보의 도움과 함께 벙커1으로 정해진 거구요."
- 그러고 보니 IRIS에 도움 주시는 선생님들 명단이 굉장히 스펙터클합니다. 조르주 아감벤, 이현우 교수, 이진경 교수, 김석 교수, 이종태 기자… 특히 이현우 교수와 이진경 교수는 이번 포럼에 참가하기도 하시는데,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가요?"어떤 분들은 저희가 무슨 친척들 후원이라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전혀 아닙니다. IRIS는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자발적인 청소년 단체입니다. 선생님들을 뵙거나 할 때도 메일이나 전화를 드립니다. 조르주 아감벤 같은 경우도 자문 관련 메일을 보냈고 흔쾌히 답신을 주셨습니다. 이현우 선생님 같은 경우는 중학교 때부터 그 분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고 메일을 보내면서 인연이 닿게 되었고요, 이진경 선생님은 저희가 잡지 협의를 하던 초창기 때 연락을 드렸는데 지금까지 항상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학생에 대한 통념을 전복시키는 활동 필요"
- 그럼 활동에 드는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나요?"전부 개인 부담이죠. 하지만 생각보다는 크게 돈이 들 만한 일이 없습니다. 잡지 출판도 블로그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고 이번 벙커1 행사도 딴지일보 측에서 무료로 대관해주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자금으로 인한 활동의 제약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달려들고 봐서 그런가… (웃음)"
- 그럼 이번 벙커1에서 개최하는 포럼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IRIS 멤버들의 발표와 외부 인사 (이현우, 이진경) 두 분의 강연으로 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고요 주제는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입니다. 대선 직후의 시국도 있고, 저희 단체의 활동 이념을 나타낼 수 있는 테마인 것 같아 선정했습니다. 저희는 이번 주제에 대해 원론적인 범위에서 이상 사회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학생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학생이 말하는 다른 세계, 학생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려 해요. 6명의 멤버들이 학교 폭력 문제, 우리 교육이 만드는 배제의 원리, 경쟁주의적 교육 등에 대해 이야기 할 예정입니다. 물론 외부 강연자 두 분은 저희와는 다른 시선에서 "다른 세계의 요구"와 관련해 이야기하실 계획입니다."
- 이번 벙커1 포럼 이후 계획이나 준비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는 있나요?"현재로서는
블로그진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멤버들의 글을 계속적으로 게재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도 생각하고, 또 앞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하기에는 대입이라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블로그진에 중점을 둘 예정입니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중에 저희의 주요 담론인 '학생성/다움'을 주제로 단행본을 출판하고자 합니다. 출판사 오월의 봄과 협의 중인데, 구체적인 발행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2월 말이면 원고가 마무리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다른 인문학 주제도 많았을 텐데, 왜 '학생성'을 IRIS의 첫 번째 주제로 삼았나요?"저희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죠. 저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힐링의 도구나 지적 교양을 넘어 '지금 여기'에 대한 삐딱하고 전복적인 사유 자체를 의미하거든요. IRIS에게 '지금 여기'는, 한국 고교생으로서의 현실입니다. 입시만을 바라보며 내신 올리고 스펙 쌓기에 열중하기 이전에 주체적 입장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통념을 전복시키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지금껏 '학생다움'과 '학생성'이라는 개념은 보수 언론과 어른들이 10대들에게 맹목적으로 주입해온 개념이거든요. 이렇게 타자적인 관점이 아니라 내부자적 시점에서 학생들이 말해야 가장 올바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에 논의되던 개념을 전복시키고, 학생들이 말하는 새로운 관점의 사유를 해 나가는 것이 '지금 여기'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 지금은 고등학생들의 자발적 모임인데, 대학 진학 이후에도 이 모임은 계속되나요?"고등학교 시절에만 국한되지 않도록 대학 진학 이후에도 이 모임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어요. 후에는 고등학생 뿐 아니라 일반인도 자유로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게다가 대학교에 진학한다면 고등학생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사라지기 때문에 학생성이라는 주제와 저희 단체 간의 유의미성 또한 부족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 이후의 주제는 역시 전복적 시선의 연장선상에서 찾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기', '배제된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기' 등의 테마를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 이 단체는 스펙 위주에 반(反)하는 단체라고 하셨는데, 사실 지금 하는 모든 활동들이 다 스펙을 포석에 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스펙을 위해 시작한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을 '불편하게 하는' 저희 단체가 대입에 큰 이득이 있지는 않을 듯 합니다. (웃음) 만약 대입 스펙을 위해 준비한 단체였다면 다른 여느 친구들처럼 IRIS의 이름으로 각종 대회를 준비했을 거에요. 하지만 오로지 스펙만을 위해 사유하는 인문학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그냥 인문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 모인 친구들이에요. 준비하고 있는 포럼, 블로그진, 모두 좋아서 하는 것들입니다. 지금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들이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스펙'으로 범주화 될지는 모르겠습니만.. 오로지 사적 성공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스펙보다는 좋아서 하다 보니 생긴 '인생의 스펙'이 더 좋지 않을까요?"
- 이제 한 달 있으면 고3입니다. 대입도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반대는 없나요?"처음에는 집에서도 흥미롭게 생각해주셨는데, IRIS 친구들과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생각지도 못했던 만큼 커져있더라고요. 요새는 시선이 썩 곱지 않으십니다. 뭐, 제도권 하에서 '딴짓거리'하는데 필요한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혹자는 이들의 활동을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들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19혁명이 고등학생들이 주도했던 혁명이었듯, 고등학생 역시 충분히 사회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생각하고 발언할 능력이 된다. 우리는 지금껏 고등학생들을 지나치게 '애 취급' 하면서, 오로지 입시라는 틀에 가둬 놓고 고등학생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딱 대학 입시까지만 제한시켜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도 인문학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생각을 펴기 위해 포럼을 개최하는 이들의 유쾌한 도전을 응원한다.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한다' 포럼은 2월 16일 종로구 혜화동 벙커1 카페에서 4시부터 7시까지 진행된다.
덧붙이는 글 | IRIS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 포럼 안내, 행사 개요 : http://blog.naver.com/weareiris/50159409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