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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순례자의 가슴에 꿈을 던지고, 순례자는 그 꿈에 생애를 던진다.
 별은 순례자의 가슴에 꿈을 던지고, 순례자는 그 꿈에 생애를 던진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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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애틋한 시간이다. 아르카 도 피노를 벗어난 길, 유칼립투스 숲은 오전 내내 신선한 공기를 뿌려준다. 이어지는 고소 산(Monte Gozo)을 넘으면 마침내 5km 떨어진 산티아고가 보이고 본격적인 아스팔트가 펼쳐진다. 산 마르코스(San Marcos)에서 바라 본 산티아고는 '끝'을 사색해야 하는 순례자를 흥분시키는 동시에 진한 아쉬움을 준다.

"무~운!"

안토니오다. 택시에서 내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문군을 부른다. "몸은 괜찮냐?"는 문군 물음에 호흡 한 번 크게 거르더니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차나 한 잔 하자며 껄껄 웃는다. "아들은?" 하며 재차 묻는 질문엔 세바스찬은 한 시간 거리쯤 뒤에서 걸어오고 있다며 자기 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답하고는, 문군의 취향을 존중해 차 한 잔과 콜라 한 캔을 주문한다.

"오늘 다들 산티아고까지 가겠지? 너도? 음, 난 어제부터 생각해 봤는데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했어. 오늘 바로 끝내버리기엔 많이 아쉬워. 일정을 하루 미루고, 오늘은 아들이랑 함께 수영장 딸린 숙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즐길 거야. 미국으로 돌아가면 아들과의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잖아."

그 마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병색에도 그의 웃음만은 건강해 보인다. 라디에이터 옆에서 노곤함을 풀고 있을 때 연이어 들어오는 순례자들이 테이블에 합세한다.

"나도 안토니오와 같은 생각이야. 천천히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어. 너무 빨리 와버린 것 같아.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걷는 게 목표였는데 생각해 보니 도착 일을 미리 정해놓고 있었더라고. 도착일이 구속이 되어버린 거야. 나도 그 알베르게에서 하루 쉬어야겠어."

칠레에서 온 알렉산드리아가 안토니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염성 강한 분위기, 미국에서 온 안드레가 말을 이어받는다.

"그럴까? 굳이 서두를 필요 없겠지? 나도 카미노에서 하루 정돈 더 머물러도 좋다는 생각이야. 어차피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한 이틀 푹 쉬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하루만 쉬어도 충분할 것 같아. 문, 넌?"

"나? 난 뭐 끝까지 가야지. 옵션이 하도 많아서 아직 갈피를 못 잡겠어."
"무슨 옵션?"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대서양이 보이는 피스테라까지 사흘을 더 걸어가서 대장정을 마무리 할 건지, 아님 새롭게 포르투갈 카미노를 걸어갈 건지, 그도 아니면 이제 다시 자전거 타고 마드리드를 경유해 동유럽으로 루트를 바꾸던지."
"생각이 많으면 후회하게 되어 있어. 가장 하고 싶은 걸 해 봐."
"다 해보고 싶어."
"흠, 난감한 친구로군."

아직 안드레 차에서 김이 피어오를 때다.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터덜터덜 들어온다. 시선이 한데 모아지고, 안토니오가 반색한다.

"세바스찬, 차 한 잔 해!"

순례자들의 환영에도 특별한 반응 없이 차를 홀짝거리던 열다섯 소년은 근처 알베르게에서 묵고,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할거란 말에 무덤덤한 표정이다.

"아빠가 좋다면 나도 좋아."

테이블에선 문군 혼자 일어난다. 깔깔대는 이야기가 한창인 그들과 작별 인사를 건넨다. 며칠 밖에 같이 걷지 않았지만 헤어짐은 항상 목덜미를 뻐근하게 만든다. 다만 마지막 종주를 같이 할 몇몇 동지들이 있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

도시로 진입한 지는 이미 오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골 카미노의 나른한 걷기가 사색의 힘이 되었다면, 규칙과 질서의 구속 아래 편리함을 도모하는 도시 보도의 바쁜 걷기는 전투의 장이 된다. 사람을 만나고, 양 떼를 만났던 길이 사람을 피하고, 차를 피해야 하는 길로 변했을 때 순례자는 눈은 초점을 잃고, 걸음은 방황한다.

그래도 끝까지 가슴을 뛰게 만드는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카미노의 주인공에서 도시의 이방인으로 인식의 전환을 맞는 문군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마침'은 기쁨이 되어야 할까, 슬픔이 되어야 할까? 그 감정을 아직은 선택할 수 없다. 도시 골목, 골목을 돌아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그 때, 별을 따라 32일 동안 순례하며 외로움 속에서 발견한 삶의 경이와 감사가 충만한 바로 그 때, 한 남자의 외침에 문군은 비로소 '마침'을 기쁨이라고 받아들이며 마음껏 감격하기로 한다. 앙헬이니까!

"세상에, 문! 나 정말 너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반가워."

이번 순례자 최고의 카미노 메이트였던 앙헬. 그가 자신과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순례자 최고의 카미노 메이트였던 앙헬. 그가 자신과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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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첫날부터 중후반까지 함께 서로의 길에 벗이 되어 주었던 그는 며칠 전부터 혼자 앞서가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바로 떠나지 않고 문군을 꼭 기다리고 있을 거란 그 약속, 착한 앙헬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둘은 감격스러워 했고, 앙헬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재희와 존, 진 남매도 함께 격한 반가움을 표현한다. 산티아고 카미노의 첫 걸음을 뗐던 순례자들 중에 이들 절반만이 길의 끝에서 다시 재회한 것이다.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코가 매워지는 묘한 감동이다.

'어라?'

덩치 산만한 친구들의 눈가가 촉촉하다. 피식 웃는 문군도 사실 가슴이 먹먹해 혼날 지경이다. 대성당 앞 광장은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서로 안고, 춤을 추고, 노래한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애 특별한 축제를 함께 나눈다. 다들 자신만의 세리머니를 펼치며 정신없어 들떠 있을 때였다. 문군이 나선다.

"자자, 다들 이리 모입시다! 여기 처음부터 같이 걸어 온 순례자들도 있고, 오늘 처음 만난 순례자들도 있는데, 어쨌거나 이렇게 반갑게 모였으니 사진 한 방 찍읍시다."

문군이 대표가 되어 순례자들을 찍고, 모두들 그에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건넨다. 광장에 모이긴 했지만 모두 목적 없이 표류하는 인간 군상이다. 다들 쉼을 핑계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길이 끝난 곳에서 몹시도 어색해 하고 있다. 누구는 완주한 대가로 증명서를 받으러 간다고도 하고, 누구는 배고프니 식사하러 간다고도 한다. 다들 뭔가를 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쉬이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저 산티아고 대성당이 주는 거룩한 의미를 나름대로 제 상황에 맞게 해석하며 사진만 찍어댈 뿐이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 모인 순례자들. 한 달 남짓 긴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의 표정이 밝다.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던 이도 있었고, 어쨌거나 다들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 모인 순례자들. 한 달 남짓 긴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의 표정이 밝다.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던 이도 있었고, 어쨌거나 다들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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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까? 왜 사나이 가슴을 울리느냔 말이다. 왜 유럽에서 온 덩치 큰 사내자식의 망울진 시선이 산티아고 대성당에 멍하게 꽂혀 있느냔 말이다. 왜 첫 만남에 샴푸 좀 빌려달라는 말에 대머리를 들이밀며 미안하다고 했던 앙헬 눈동자가 빨개지느냔 말이다. 왜 오늘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뜨겁게 포옹하며 만나자마자 이별을 얘기해야 하냔 말이다. 왜 다들 가겠다는 장소로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하고 이별의 난처함을 그저 서성거림으로만 표현하느냔 말이다. 왜 기쁨이 깊은 한숨으로 치환되어야만 하느냔 말이다.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호텔의 조식과 석식. 순례 증서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 한하여 사흘 동안 무료로 먹을 수 있다.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호텔의 조식과 석식. 순례 증서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 한하여 사흘 동안 무료로 먹을 수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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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거룩했다. 더없이 행복했다. 걸음을 섞고, 마음을 섞어 날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카미노의 축복이 벌써 아련해진다. 겨울 카미노에서 만난 순례자들이 배려의 선순환으로 완주했음이 기적이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겸손한 인격들을 통해 단 한 번도 마음 다치지 않고 완주했음이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상식이 되는 길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이해와 배려가 충만했던 시간들은 문명의 삶으로 회귀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삶의 회로를 바꿀 것을 종용한다. 문군에게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모든 것이 사랑이었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감사였다.

장엄한 산티아고 대성당의 야경.
 장엄한 산티아고 대성당의 야경.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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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대성당의 첨탑을 바라보던 문군은 카미노를 걸으며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을 앞으로도 계속 고수하기로 한다. 원칙을 만들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생각이 많다. 어느 날보다 푸르게 시린 겨울 하늘이다. 순례자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얼마 후 생각을 마친 문군도 걷기 시작한다. 서쪽 하늘의 별을 따라 걸어왔던 청춘의 날카로운 추억을 동력 삼아, 마음을 따뜻하게 지필 행복 찾기를 목적 삼아 다시 혼자가 된다. 오늘 밤만은 콜라가 아닌 포도주 한 잔으로 서툰 폼을 잡아볼까 고민하면서.

덧붙이는 글 | 2012년 2월 10일의 기록입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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