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에 가면 '자만동 벽화마을'이 있다. 벽화마을 대부분이 그렇듯 그곳도 산동네, 가파른 계단들이 있는 마을이다. 전주의 역사를 살펴볼 때, 경기전을 끼고 있는 한옥마을이 중심가였다면, 그 변두리에 해당하는 마을이었을 터이다.
지난 12일 벽화마을을 돌다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지석을 발견했다. 오래된 것 같기는 한데, 벽화와 시멘트, 골목 담 등과 경계 없이 붙어있어 방치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문화재급 표지석이었다. 조선시대 유물로 1900년 조선 고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나무를 베거나 몰래 묘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표지석이었던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지에 대한 자료들을 숙지하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그렇게 계획적일 수 없고, 여행의 맛이란 때론 느닷없이 떠났다가 느닷없이 만나는 풍광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서 그 묘미를 더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전주하면 '한옥마을'외에는 알지 못했다. 오목대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는 중에 눈에 들어온 벽화마을,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목대 올라 돌아보는 중 눈에 들어온 벽화마을
벽화들은 그려진 지 오래되지 않은 듯 깨끗했다. 낙서도 없고, 낡지도 않았다. 때론 낙서와 낡음이 더해지면서 벽화의 운치를 더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괜스레 슬퍼진다. 조금은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마을에 화사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자 그린 그림들이었는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서 그렇다.
유명한 벽화마을들이 몇 곳 있다. 내가 방문한 곳은 혜화동 낙산공원 근처의 벽화마을과 홍제동 개미마을이 고작이다. 그리고 간혹, 벽화마을까지는 아니지만 벽화가 드문드문 그려진 곳들을 만나긴 했다. 서대문구 금화동 금화아파트 근처, 목포 유달산으로 가던 길에 만났던 벽화, 전남 광주의 어느 골목길 등등.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가파른 산동네, 달동네이거나 가파른 계단들이 좁은 골목길 사이로 이어진 곳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동네이니, 나름 가난한 이들이 살아갈 터이다.
그런 까닭에 벽화마을에 서면, 아름다운 그림과 예쁜 그림에도 조금은 슬프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이들의 마음을 그려보게 된다. 그것은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아니어도 좋은 이유는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그림들을 보면 '살아있는 그림'을 보는 듯 기쁘다.
온통 그림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그림들 사이사이 감출 수 없는 흔적들과 오래된 것들이 남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조화는 '공감'이 아닐까? 서로서로 그 아픔들을 공유하고 느끼면서 서로를 치유해 주는 그런 '공감' 말이다.
경쟁사회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는 바보스러운 단어다.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공격을 당한다. 누군가의 허점을 보고, 상처를 보고, 허물을 보고 덮어주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온 가족이 느닷없이 전주 한옥마을로...
설날연휴, 온 가족이 느닷없이 전주 한옥마을로 떠났다. 다 큰 녀석들이 아빠와 함께 여행하고 싶다고 했을 때, 운전기사 노릇을 할 줄 알면서도, 물주 노릇을 할 줄 알면서도 기쁘게 동행했다. 조금 더 크면 그럴 날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온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자주 갔는데, 아이들이 크면서부터는 견물생심이다. 수험생이어서 안 되고, 이런저런 일들로 안 되고, 나는 나대로 안 되고... 그러다 결국, '당신이나 다녀오세요'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런 시간 뒤에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뜻하지 않는 행운을 만난 것이다. 마음이 아리면서도 그들의 삶이 나와 다르지 않은 듯하여 아릿하고, 그림을 그린 이들의 손길 역시도 그러했으리라 생각하니, 그 공간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벽화마을, 다양한 형태의 시도들이 이어지고, 그런 벽화들을 도심 곳곳, 마을 곳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