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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게 세상을 묻다> 표지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 표지
ⓒ 에이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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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예술 장르가 또 있을까? 스크린 속에 담긴 '종합 예술'은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여 감동을 주고, 인식을 전환하게 하고, 신념을 가지게 한다. 어쩌면 깊은 내면에까지 스며들어가 두고두고 삶의 갈피에 끼어들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접근성도 강하며, 삶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게다가 디지털화 되면서 저장성도 매우 좋아졌다.

그러나 때로 영화는 오락과 예술, 예술과 사회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상업성과 손잡으면서 오락성이 강한 영화는 많은 관객을 불러들이기도 하지만, 매우 차원 높은 예술성을 뽐내기도 하며, 감독의 강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의 가장 비근한 부분을 충분히 반영하여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상업성과 예술성 그리고 사회성은 때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 보완하기도 한다.

나는 영화 <부러진 화살>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부러진 화살>은 삐뚤어진 사법부의 독선과 오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 특별한 장치 없이도 사실성에 바탕을 둔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기력으로 영화 미학을 보여주며,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이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도외시하지 않고 감독의 주제의식을 잘 담아 전달한 작품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영화를 전공한 김용희와 정치를 전공한 이승연이 공저한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도 영화를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을 조명하고 있다. 정치를 전공한 저자의 경력이 보여주듯, 주로 사회성을 강하게 띄고 있는 작품들을 모아 소개한 다음에, 그 작품들의 주제의식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사회 현상과 문제들을 연결 짓는 책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인물들을 먼저 소개하고 나서 그 영화 내용과 관련된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화와 사회, 사회와 영화가 서로를 반영하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에는 10개의 주제에, 그 주제와 관련된 영화 3편씩, 총 30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오락적 요소가 강하지 않아 쉽게 만날 수 있는 영화가 아니어서, 나도 실제 본 영화는 5편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혀 대중성이 없는 영화만 있는 게 아니라 <아이 엠 샘>이나 <1번가의 기적> 등 잘 알려진 영화도 들어가 있다.

10개의 주제로 영화와 우리 사회를 본다

영화 속에서 짚어본 첫 번째 세상의 문제는 역시 정치이다. <스윙보트>라는 영화를 통해 투표 행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고, <맨 오브 더 이어>에서는 선거와 정치적 리더십의 문제를, 그리고 독재 권력과 저항을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맨 오브 더 이어>는 유명한 토크쇼 코미디언인 톰 돕스가 지지자들에게 불려나와 미국 민주당·공화당 양당의 틈새를 비집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되고, 양당 후보에게 명백히 뒤지고 있었지만, 개표 기계의 오류로 당선된다. 당선된 뒤 이를 알게 된 톰 돕스는 고민 끝에 '대통령이라는 엄청난 권력을 진실이라는 더 큰 절대권력 앞에서 반납'하게 된다. 그래서 인기가 더 치솟아, '올해의 인물'이 된다는 줄거리다.

저자는 이 영화에서 '안철수 신드롬'을 본다. 톰 돕스처럼 지지자들에게 호출당한 것도 같고, '새롭고 다른'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같았기 때문이다. 인물은 시대가 만들어낸다고 하였던가? 안 후보 신드롬은 안 후보만의 매력이라기보다는 기존 정치 행태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어부지리 효과였다고 분석하는데, 그것이 시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 대중의 열망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일쑤이므로.

도리어 톰 돕스의 가치는 지지자에게 호출되어 출마한 데 있다기보다 진실 앞에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에 있다 하겠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이면 안 되고 절대적일 수 없다. 그래서 톰의 다음 말이 참 적실하다.

"정치인들은 기저귀와 같습니다. 자주 바꿔줘야 하는데 이유는 똑같습니다."

갈지 않으면 냄새가 난다는 거다.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는 다소 건조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아픈 부위를 건드려나간다.

정치에 이어서 부도덕한 재벌 문제, 하우스 푸어와 가계부채, 금융자본과 탐욕의 문제를 다룬다. 최근에 나온 한국 영화 <돈의 맛>이나 미국 할리우드 영화 <월스트리트> 속에 담긴 세상인데, 경제(돈) 문제는 늘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는 면에서 영화가 주는 영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 정의, 골목 상권을 위협하는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업체, 국가 기관의 민간인 사찰, 청소년, 답답한 교육현실, 성교육과 미혼모, 그리고 생태 환경문제를 영화를 통해 묻고 있다.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통쾌함은 언제 느낄 수 있을까?

지난해 5월 고 이윤정씨가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6년간 일하다 악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 본관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회원, 삼성일반노조, 시민들이 고인의 죽음에 대해 삼성측의 한마디의 사과가 없자, 삼성 본관으로 향해 던진 국화 꽃이 놓여 있다.
 지난해 5월 고 이윤정씨가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6년간 일하다 악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 본관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회원, 삼성일반노조, 시민들이 고인의 죽음에 대해 삼성측의 한마디의 사과가 없자, 삼성 본관으로 향해 던진 국화 꽃이 놓여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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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에린 브로코비치>다. 소개된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두 번 이상 본 영화이기도 하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환경을 오염시킨 기업의 불법행위와 거짓말을 파헤친 통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나는 '에린'의 배역을 맡은 줄리아 로버츠의 '거침 없는 하이킥'이 더 재미있었다. 도무지 세련미라고는 없는 말투와 욕설, 사무실에 걸맞지 않는 옷차림, 따발총 같은 언변, 누구든지 기죽지 않고 퍼붓는 당당함, 이런 매력이 또 다른 통쾌함으로 남아 있는 영화이다.

저자는 무식해보이나 열정이 넘쳐나는 에린 브로코비치가 대기업의 추악한 몰골에 주먹을 날리고, 중크롬 성분에 병든 주민들이 그녀의 열정과 정직함에 마음을 열고 소송을 맡겨 승리하는 영화를 보여주며, 곧바로 우리 사는 세상과 연결 짓는다. 그건 바로 '삼성'이다. 삼성반도체 공장에 다니다 백혈병으로 사망하였거나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얘기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앓고 있는 병들은 듣기만 해도 무섭다. '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 각종 암, 베게너육아종증, 악성 림프종, 루게릭병, 흑색종, 게다가 공황 장애, 정신분열증, 우울증, 그리고 여성 불임, 유산, 태아 기형 등 희귀 질환에다 정신병, 기형아까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에 따르면, 2012년 9월 기준 삼성전자 계열사 직업병 피해자 제보자 수는 총 151명으로 이중 5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전자(반도체, LCD, 휴대폰 및 기타)의 경우는 제보자 125명에 사망자 49명으로 전기(12명 제보에 7명 사망), SDI(10명 제보에 2명 사망), 테크윈(4명 제보, 사망 없음)에 비해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132~133쪽)

이런 기록은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 환경이 노동자들의 몸을 망가지게 하였음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는데, 삼성은 버티고 있다. 반올림은 계속해서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하고, 노동부에는 역학조사를, 삼성에는 화학물질 정보 제공을 요구하고 있지만, 삼성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병은 직업병이 아니므로 산재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고 한다. 산재가 아니라면, 삼성은 어쩌자고 희귀 질환을 앓을 가능성이 높은 약골들을 한 공장과 사업장에 그리도 많이 채용했단 말인가?

답답하다.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통쾌함은 도대체 언제 느낄 수 있을까? 왜 우리 사는 세상의 덩치 큰 기업들은 인간의 탈을 쓰기를 그리도 싫어할까? 버티고 시간 끌면 결국 약자인 피해 당사자들이 나가 떨어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오리발에, 거짓말에, 무신경에, 뻔뻔스러움과 교활함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믿는 걸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우리 사회에 슬픔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영화, 그리고 책

영화 <아이 엠 샘>에서 저자는 장애의 의미를 살핀다.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쏟는 정신지체인 샘(숀 펜)보다 샘의 변호사 리타와 증언을 해준 샘의 이웃 애니야말로 '많은 위로와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마음의 장애자'라고 규정하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애초에 시혜자와 수혜자는 따로 없다는 저자의 통찰에 공감되었다. 시혜자, 수혜자라고 하는 시각 자체부터 이미 잘못된 편견과 오만이 아닌가?

'스스로 살기', '더불어 살기'는 비단 한 개인의 성장을 위한 조건만이 아니라 성숙한 사회로 향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입니다. 제도 개선이란 것이 사람들의 절박한 외침에 늘 한 보 늦는 게 현실이지만, 외침의 끝에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사회라면, 성장을 멈춘 채 젖먹이 아기만 득실대는 '장애1급 사회'가 될 겁니다.(143쪽)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는 또한 동성애 문제와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의료 민영화와 재개발, 사회안전망과 복지, 여성 고용, 출산, 보육과 이주 여성, 그리고 노인과 청년 실업 등의 문제들이 총망라되어 있어, 우리 사회가 넘고 가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지,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우리 사회에 슬픔이 얼마나 많은지 찬찬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일 문제를 다룬 영화 <풍산개>와 <크로싱>은 너무 아프고 참혹하다. 그 현실이 아프고 참혹하므로.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에는 구체적인 통계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 문제를 영화를 통해 정밀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높임말 어조를 사용하고 있어 겸손한 모습으로 대화하듯 조용조용히 함께 영화를 읽고 세상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영화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 <수상한 고객들>의 주인공 병우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한 말처럼, 좋은 세상을 만드는 선택(Choice)이 있어야 좋은 세상을 끌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이 책과 함께 가는 도중에 떠올랐다.

덧붙이는 글 |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 김용희·이승연 씀, 에이지21 펴냄, 2013년 2월, 1만3000원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 - 우리 사회 10대 난치병 feeling에서 thinking까지

이승연.김용희 지음, 에이지21(2013)


태그:#영화와 정치, #사회문제, #공감과 소통,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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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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