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겨울의 일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김치냉장고에서 걸핏하면 삑삑삑 하는 경고음이 난다. 냉장고 문을 오래 열고 있거나 문이 잘못 닫혔을 때 나는 그 소리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더니만 또 그러기 시작한다. 사실은 지난 겨울에 큰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손써 보다 안 돼 AS기사까지 불렀건만 결국 정확한 원인을 못 찾고 포기했던 것이다.
아내는 못 고칠 바엔 아예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조치해 달라 요구했지만, 부품이 다 붙어 있어서 안 된단다. 그렇게 몇 달 고생을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인가 저절로 괜찮아졌다. 그랬던 게 다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아내는 벌써부터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직접 안 들어본 사람은 고요한 새벽에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이 소리가 얼마나 고문에 가까운 소리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경고음을 만든 사람들은 필시 그 소리를 일종의 기계가 지르는 비명처럼 생각한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비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작동되는 자동차 도난경보기 소음과 다를 바 없다. 더 가혹한 것은 이 기계가 올 김장을 통째로 망칠 생각이 없는 한 결코 전원을 뽑아서는 안 되는 김치냉장고란 사실이다.
지난 겨울에 나는 새벽에 나갔다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느라 집에 들어오면 쓰러지기 바빴고 잠도 깊이 잤기 때문에 경고음에 대한 기억이 아내만큼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게다가 집안일은 거의 신경을 끄고 살았기 때문에 AS기사까지 불러서 안 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해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좀 나서 이것저것 해묵은 집수리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한편으로 쏠쏠하게 재미도 느끼던 터였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아내의 주문에 뻘쭘하게 일어나서 냉장고 안팎을 살펴보지만 특별히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없다. 하기야 주부들이 쓰는 이런 가전 제품에 특별한 사용상의 잘못이랄 게 있을 리 만무다. 김치냉장고 하루에 몇 번이나 열었다 닫겠는가? 어쨌든 그냥 형식적으로 안에 들은 김치통 한번 슬쩍 어루만져 주고 문 다시 닫고 냉장고 옆면을 툭툭 쳐 보는 것 말고는 해볼 게 없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괜찮아지기도 한다.
나는 컴퓨터가 하드웨어적으로 이상이 생겼을 때 이런 식으로 해서 고친 경험이 많다. 그냥 본체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 뒤에 툭툭 치거나 하면 거짓말처럼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뚜껑을 열어 램 같은 것을 뽑았다가 다시 끼운 뒤에 스프레이로 먼지를 청소해 주면 제법 많은 경우에 문제가 해결된다. 이번 김치냉장고 문제도 그렇게 해서 해결되기를 바랐는데.. 괜찮아진 건 잠깐이고 얼마 지나자 또 그러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좀 더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자. 일단 분명한 것은 안의 내용물이나 문에는 잘못된 게 없다는 사실. 그렇다면 원인은 다른 데 있다는 건데, 혹시 수평이 안 맞아서 그런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 같은 것도 수평 안 맞으면 문제가 되니까.
그런데 집의 도구 중에 수평을 재는 수준기가 없다. 할 수 없이 길다란 실 끝에다 나사못을 매달아 그걸로 냉장고 수평을 재기 시작한다. 지켜보던 아내는 이 간이 수준기의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하하, 뭐 이런 걸 가지고 감탄까지. 이건 중력의 개념만 알고 있으면 초등학생도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인데. 그렇게 재어 보니 우리 집 김치냉장고가 똑바로 못 서 있고 제법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이것으로 해결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이리저리 괴고 다리를 조정해서 수평을 맞췄다. 그렇게 하고서 잠시 지켜보는데 소리가 안 난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남자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웬걸. 잠시 지나니 다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허탈했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한다. 이쯤 되면 슬슬 약도 오르고 승부근성 같은 게 치밀어 오른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거지?
팩트를 하나씩 종합해 보자. 지난 겨울에 그랬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는 지금에 와서 다시 그런다는 것은 분명 온도와 관련이 있다. 특히 늦은 밤이나 새벽에 더 심하다는 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게다가 김치냉장고를 둔 곳은 뒷베란다이므로 주방보다 더 춥고 바깥 온도에 민감하다.
그렇다면 온도가 내려가면 경고음이 난다는 얘긴데, 그러기에는 아직 기껏해야 최저 영하 3~4도 수준이니, 정말 그렇다면 상당히 큰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 날씨를 못 견디고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건 본격적으로 추워지는 몇 달 동안 하루 종일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비슷한 현상을 토로하는 글을 두어 개 찾을 수 있었다. 온도가 내려가면서 부품 쪽에 결로가 생기면서 오작동이 발생하는 것 같다는 추측이다. 그런데 사운드칩이 기판에 부착이 돼 있는 거라 그것만 떼어내거나 소리를 죽일 수는 없다는 얘기.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 집 주방에는 김치냉장고를 둘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옷방으로 쓰고 있는 작은 방으로 옮기는 것이다. 방에다 냉장고를 둔다는 게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설령 그렇게 옮겨서도 소리가 계속 날 경우에 방문을 닫으면 침실과 거리가 제법 되기 때문에 소리가 잘 안 들릴 거란 계산이 섰다. 게다가 걸려 있는 옷들이 방음재 역할을 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더 볼 것이 없었다.
이삿짐 옮기는 사람들이 하듯이 냉장고 안의 내용물을 빼놓은 뒤 욕실 매트를 가져다 밑에 끼운 뒤 아내랑 둘이서 옷방으로 옮겼다. 하루에 몇 번 들어갈 일 없는 방이기도 하거니와, 조금 어색하긴 해도 아주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뒤 로또 당첨이나 기다리듯이 긴장되는 마음으로 결과를 지켜본다. 몇 분 몇 십 분이 지나도 잠잠하다. 결국 이거였구나! 온도 때문이었구나!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김치냉장고는 잠잠했다. 나는 비로소 임무 완수를 선언했다. 등 뒤에서 아내의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바깥기온이 영하 15도 밑으로 떨어졌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거실에서 혼자 모닝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삑삑삑…."평소 옷방은 보일러 밸브를 잠가 놓고 지낸다. 그렇다면 저 소리는 무슨 뜻인가? 어쩔 수 없이 옷방의 보일러 밸브를 열었다. 조금 지나니 다시 잠잠해진다.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일도 겪게 되었다. 냉장고 따뜻하라고 보일러 때주는 일을….
그 뒤로 기온이 15도 밑으로 내려가는 아주 추운 날이면, 잠자리에서 우리 부부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김치냉장고 방에 보일러 때드려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