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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들 상당수는 유산과 불임의 고통을 안고 산다. 같은 병원의 한 간호사는 임신한 줄도 모르고 계속 일하다 유산했고, 마취과의 한 간호사는 무뇌아를 출산했다가 사흘 만에 잃었다. 마취가스 때문이 아닐까 의심스러웠지만 밝혀낼 방도가 없었다. 아이가 없는 동료 간호사도 꽤 많다. 미성씨 또한 결혼한 지 13년째인데 아직 아이가 없다. 불임의 원인은 분명치 않다. 불면으로 인해 생체리듬이 깨진 탓일 수도 있고 일이 고된 탓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간호사의 유산 및 불임 비율이 평균보다 높다는 점이다. 미성씨는 지난 몇 년간 아이를 갖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했다. 병원에서 몇 차례 시술도 받았다. 돈도 돈이지만 너무 고통스러워 결국 포기했다. 포기하고 돌아온 날, 남편이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잠갔다. 잠시 후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울음소리가 미성씨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다. 미성씨는 피해자이면서 남편에게는 가해자였다. - <벼랑 위의 꿈들>에서

<벼랑 위의 꿈들> 겉표지
 <벼랑 위의 꿈들> 겉표지
ⓒ 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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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성(42)씨는 간호사다. 그녀가 아이를 포기한 후 남편은 가족들에게 다시는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편도 마음 속으론 아이를 무척 기다린다는 것을. 아니 자신보다 더욱 간절히 아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미성씨는 남편의 이런 마음을 느낄 때마다 '이제라도 병원을 그만두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갈등하곤 한다. 아마도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장담할 순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일을 놓고 싶지 않다. 불임의 불행을 안겨준 일이지만 누군가를 살리는 이 일을 우리 중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만 하고 그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보람 있기 때문이다.

미성씨는 1993년부터 경기도 시흥의 한 중소병원에서 일해왔다. 간호사 경력 18년차의 베테랑이지만 현장에서 일한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동기들은 10년 전에 수간호사가 되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자신보다 근무환경도 좋고 무엇보다 연봉이 훨씬 높다. 때문에 대형병원마다 간호사 자리를 1년 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미성씨도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병원에서 간호사를 시작했다. 그런 병원을 굴러온 복 걷어차듯 미련 없이 그만둔 것은 '병원은 대기업이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수가 괜찮으니까, 세상이 다 그러니까, 싸워봤자 나만 피곤하니까' 등의 이유로 참고 견디고 눈감고 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 임금이 중소 병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고 근무 조건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대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해서가 아니다. 그 차액은 고스란히 환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감기만 걸려도 대형 병원에 가면 진료비가 5만 원 가까이 나오는 게 현실이다. 대형 병원들은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서 의료수가가 올라가도록 과잉진료를 해야 한다. 그런 불합리를 미성씨는 견디지 못한다. 중소병원은 여유롭지 못한 환자들이 많이 찾고 그들의 경제형편을 고려해 과잉진료를 자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때로는 과잉진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미성씨 눈에 걸렸다가는 나이 많은 의사든 병원장이든 그날이 제삿날이다. 옳지 않은 것은 반드시 지적해야 속이 편한 미성씨다. - <벼랑 위의 꿈들>에서

'인권'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19명의 삶 이야기

<벼랑 위의 꿈들>(삶창 펴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인권>에 '길에서 만난 세상'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글들을 엮은 르포집이다. 저자는 부모의 삶을 재조명한 <빨치산의 딸>(전 3권)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소설가 정지아씨다.

<인권>의 '길에서 만난 세상'의 주인공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 철탑 위의 농성 노동자, 길거리의 환경미화원, 노점상, 외국인 노동자, 대학이나 아파트 청소원, 아파트 경비원, 거리를 떠도는 노인들, 미혼모, 코시안(한국인 아버지와 아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신용불량자, 등록금 마련에 허덕이는 아르바이트 대학생 등 절박한 현실 때문에 차별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작가가 전국 각지의 그들을 직접 인터뷰해 그들의 생활과 처한 현실을 들려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인권 현주소를 묻는다. '길에서 만난 세상'에 실린 글들은 그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으로 <길에서 만난 세상>(2006, 우리교육),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2007, 삶이보이는창), <보이지 않는 사람들>(2009, 우리교육)로 출간됐다.

정지아 작가는 저마다 가진 이름이 있건만 함께 일하는 한국인들에게 '야 인마'로 불리는데다 걸핏하면 구타를 당하는 외국인 선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 화장실 볼일이 아무리 급해도 교대로 가야만 하는 다산콜센터(120)의 텔레마케터 ▲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정작 자신들의 복지 그 권리는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장애인 활동보조인 ▲ 한진중공업의 해고노동자 ▲ 제주 강정마을 사람들의 투쟁 ▲ 사납급 채우기에 등골 휘는 회사택시 기사 ▲ 보수를 떼이기 일쑤요, 기초생활비조차 받지 못하는 드라마 보조 작가와 영화미술감독 ▲ 촌각을 다퉈 달려야만 하는 청소년 오토바이 배달부 ▲ 견딜 수 없는 수준의 노동 강도와 노동시간은 기본이고 폭언이나 폭행, 성희롱에 노출된 요양보호사 ▲ 학기 내내 아르바이트에 허덕였건만 졸업과 동시에 빚쟁이가 된 청년실업자 ▲ 재래시장과 골목상인 등의 고단하고 아스라한 생활과 처한 현실들을 들려준다.

간호사 최미성씨의 목소리와 일상을 통해선 치료보다 이윤추구가 먼저인 대형병원들의 부조리와 과잉진료, 의사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도 그에 맞는 대우는커녕 나이 어린 의사들에게 반말을 듣기 일쑤인 의료계의 도덕부재와 차별, 교대시간이 일정치 않은데다가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에 불과한 간호사들의 고단한 일상을 들려준다.

어린 시절 '백의의 천사'라 불리곤 하던 간호사를 꿈꾼 적이 있다. 나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도 있었고, 간호사의 꿈을 이룬 친구도 있다. 내 딸과 조카도 초등학교 저학년 언젠가 '커서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간호사는 지난날 소녀들이 참 많이 선망했던 꿈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한때의 꿈이었고, 또 많은 소녀들이 선망하는 만큼 이 책을 읽기 전까진 간호사란 직업이 여성의 직업으로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해온 것 같다. 그렇기에 <벼랑 위의 꿈들>을 통해 만난 간호사들의 고단한 현실과 차별은 쉽게 털어지지 않는다. 간호사들의 높은 불임률 그 현실은 특히 더 안타깝게, 그리고 의외로 읽혔다.

벼랑 끝에 선 또 다른 나, '99%'를 만나다

지금까지 19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해고노동자도 있었고 비정규직이 있었고 아르바이트생도 있었으며 외국인 선원도 있었다. 직업도 국적도 나이도 달랐지만 그들 모두의 꿈은 참으로 소박했다. 해고나 재계약을 염려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인생,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주말이면 가족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인생, 이 정도가 그들이 꿈꾸는 삶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조만간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몇몇 사람은 오히려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고, 몇몇 사람은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이것이 세계 경제순위 15위, 일인당 GDP 2만 달러의 한국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초상이다. - <벼랑 위의 꿈들> '책을 내며'에서

저자가 책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한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자본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아버린 평범한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끊임없이 내몰리고 있는 우리 누군가의 이야기이거나 매일 만나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남의 일이라고 무관심하게 넘기고 말았던 일이 실은 나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간호사들의 애환은 우리들이 부당한 진료를 받지 않을 권리와 잇닿아 있고, 대형마트 입점에 맞서 싸우는 서울 망원시장의 조태섭씨나 주변 상인들의 딱한 사정은 우리의 건강한 소비 혹은 먹을거리 문제와 잇닿아 있다. 그러니 책 속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함은 지나친 비약일까?

책 속 주인공들을 만나는 동안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나머지 99%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에 시달리는, 최근 들어 더욱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1 대 99 사회'란 화두가 끊임없이 떠올랐음도 덧붙이고 싶다. 이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던 것은 책 속 주인공들과 그들의 사정이 99%의 우리들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노라는 이유와 함께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벼랑 위의 꿈들> 정지아 씀, 삶창 펴냄, 2013년 1월, 252쪽, 1만4000원



벼랑 위의 꿈들 - 길에서 만난 세상, 인권 르포르타주

정지아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13)


태그:#인권, #르포, #국가인권위원회, #양극화, #정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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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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