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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역시 날씨다. 제주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에 '오리털 점퍼 괜히 가져왔네...'라며 유유자적 올레길을 걷고 옥색의 바다에 눈을 호강하며 돌아갔다면 당신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아마도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아서 그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겨울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다. 며칠 동안 해는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잿빛의 우중충한 하늘과 스산하고 세찬 비바람에 당황하다가 야심 차게 계획한 일정의 반도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날씨에 상관없이 좋은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날씨는 바꿀 수 없지만 여행 전략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날씨를 대비한 '플랜B'를 만들어 와야 하며 제주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사전에 공부해야 한다.

눈떠보니 사방에 눈이... 이게 웬일?

지난 19일에 제주에 도착한 여행객들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전날 밤에 근 두 달 만에 제주에 눈이 소복이 내렸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무렵 이후로 올 겨울들어 두 번째 내린 눈이다.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눈이 될 듯하다.

눈이 올 거라는 예보도 전혀 없어서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보니 온 사위에 눈이 가득해 당황했다. 육지에서 손님 둘과 올레길·오름트레킹을 하기로 돼 있는 날이었으니.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친다. 드디어 눈꽃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을 맞았다는 것, 도로가 빙판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아이젠을 구입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등등.

제주경찰청 누리집에 들어가보니 제주 산간의 전 도로가 통제 상황이고 체인 없이는 통행불가능하단다. 이런 날 압도적이고 진정한 눈꽃과 설경을 보려면 한라산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면 접근이 어렵고 또 여러 가지 '중무장'이 필요하다. 눈이 온 직후인 오늘 같은 날은 백록담과 윗세오름이 아니더라도 환상적인 눈꽃과 설경을 볼 수 있는 숲길과 오름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날씨가 화창해 벌써 눈이 녹기 시작하는 중산간 도로를 살며시 내려가 해안도로로 나가보니 그 많던 눈이 자취도 없다. 낮은 지역의 영상기온과 햇살·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주 날씨는 정말 요지경'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육지 손님 둘은 오늘의 일정을 올레길 20코스로 정하고 왔단다. 제주에 눈이 내린 귀하고 황금 같은 날에 눈은 자취도 볼 수 없는 찬바람 쌩쌩 부는 해안가로 올레 탐방을 한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1초만에 합의할 수 있었다.

무거운 장비없이 설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일정을 급변경한다. 손님들을 만나러 오는 동안 곰곰이 머리를 굴려 내가 선택한 장소는 비자림과 돛오름 그리고 사려니숲이다.

비자림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원래도 요정의 숲처럼 신비로운 곳인데 거기에 눈꽃을 더하니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굳어 있던 심장이 쿵쾅쿵쾅"

비자림의 눈꽃
 비자림의 눈꽃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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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없는 조용한 숲에 모든 비자나무 가지마다 눈이 내려 앉아 시간이 그대로 정지된 듯하다. 요정들이 사는 눈의 왕국 같은 느낌이랄까.

한 손님에게 눈 덮인 제주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별말이 없이 눈옷을 입고 있는 비자나무만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육지로 돌아간 후 소회가 어땠는지 궁금해 그의 블로그에 가보니 이렇게 적어놨더라.

"... 이번 여행은 떠나기 전 담담하기만 했지요.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져 감을 슬퍼하며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 타고... 기류 악화로 하늘에서 한참을 가만히 떠 있고, 20분 늦게 제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제주는 하얗군요. 이런... 딱딱하게 굳어있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합니다. 옆사람이 알아챌 정도로 요란하게 뛰는 내 심장을 진정할 수 없어 그냥 두기로 합니다..."

비자림의 눈꽃
 비자림의 눈꽃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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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의 눈꽃
 비자림의 눈꽃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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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오름은 비자림의 뒷산 격이다.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제주의 속살 같은 곳이다. 비자림을 오른쪽으로 타고 돌아 2km 가면 돛오름 입구다.

해발 285미터의 돛오름은 비자림 서남쪽에 있는 기생화산체 인데 산 모양이 돼지처럼 생겼다하여 돛오름(혹은 돝오름·돝은 돼지를 가리키는 제주 방언)이라 한다. 정상에 1km정도 되는 분화구 둘레길이 사방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한다.

돛오름의 설경
 돛오름의 설경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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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오름의 설경 - 가운데 보이는 숲이 비자림이다.
 돛오름의 설경 - 가운데 보이는 숲이 비자림이다.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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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오름 정상에서 본 하늘
 돛오름 정상에서 본 하늘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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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곳마다 온통 청정의 눈이 가득하다. 녹색과 어우러진 새하얀 세계가 온통 머릿속을 헤집어 점점 몽환의 나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이틀 후, 설경탐험 2회전을 위해 사려니숲으로 간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눈꽃은 없어졌다. 사방 천지에 가득했던 눈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하룻밤의 꿈처럼 덧없이...

흔적 감춘 눈꽃, 참 덧없네

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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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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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우뚝 솟은 삼나무들이 짙은 향을 내뿜고 있는 원래의 촉촉한 숲길로 가뿐히 돌아와 있다. 바닥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눈의 흔적만이 눈이 내렸음을 말해 주고 있다. 아마도 이제는 다시 1년을 기다려야 제주 숲의 눈꽃을 볼 수 있으리라.

겨울의 제주여행도 다양한 테마를 정해 볼 수 있다. 화창한 날엔 올레길 탐방, 비오는 날엔 숲길 여행, 동쪽 오름에서의 해돋이 감상, 서쪽 어느 곳에 있다면 해넘이를... 혹시 예상치 못한 눈을 만났다면 주저 없이 근처의 숲으로 가보시길 바란다. 백일몽 처럼 눈꽃들이 사라지기 전에...


태그:#제주설경, #비자림, #돛오름, #돝오름, #사려니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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