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하철에서 출퇴근길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지하철 잡상인', 이들만의 전문 용어로는 '기아바이'라 불린다. 기아바이라는 용어는 굶주림의 '기아'(飢餓)와 판매의 '바이'(Buy)에서 따온 합성어다. 즉, 가난한 지하철 이동 판매상을 이르는 말이다. IMF 이후 급격하게 양상된 기아바이는 유통 업체에서부터 구역 간 회원제까지 운영하며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가난한 지하철 이동 판매상, 기아바이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봤다. <기자말>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기아바이. 그들의 대다수는 하루 일과가 비슷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만 물건을 팔았고, 정해진 구역이 있었다. 정해진 구역 내에서는 일찍 온 순서대로 열차를 탄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는 물건들은 직접 사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받아온다고 했다. 기아바이들은 물건 받는 곳, 즉 그 사무실들을 '유통업체'라고 지칭했다.
(관련 기사 : "지하철에서 이런 거 파는 거 쪽팔리지만...")"구로역이나 금정역으로 가보세요."지난 2월 17일 저녁 서울역, 기아바이를 만났다. 파란색 손수레에 가득 실린 우산들. 그는 비가 온다는 소식에 우산을 들고 장사 나왔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 팔리지 않은 우산들을 들고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어디로 가면 이 물건들을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유통업체로 가보라"고 한다.
그는 유통업체 사무실이 많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지하철 1호선의 구로역, 금정역, 남영역, 회기역 등을 꼽았다. 19일 오후, 기자는 유통업체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구로역으로 향했다.
유통업체가 있다는 구로역 근처의 한 건물. 파란 손수레를 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구석에 위치한 '○○유통'이 눈에 띄었다. 문에는 물건을 홍보하는 전단지들이 붙어있고, 그 옆에는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유통업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득 쌓인 여러 가지 물건들과 파란색 손수레들이 눈에 띄었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3명. 사무실 관계자에게 기아바이와 유통업체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 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한 줄이라도 나가면 행정당국에서 '아직도 기아바이가 많구나'라고 판단하고 단속을 강화해요. 그게 우리한테는 곧바로 폭탄이 돼서 날아오는 거죠. 그나마 하루에 2-3만 원 버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단속이 강화되고 과태료가 나오면 10만 원이에요.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사람들인데, 더 힘들어져요. 그래서 대부분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유통업체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통업체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갔다. 지난 2월 20일 오후 1호선 관악역 근처에 있는 유통업체를 찾았다. 기자는 취재를 위해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아보고 싶다"고 문의했다. 알고 보니 이곳은 기아바이와 직접 거래하는 곳이 아니었다. 유통업체에 물건을 납품하는 도매 사무실이었다.
기아바이들의 모임 "회원 아니면 장사 못 한다"
도매상 김아무개씨는 유통업체 사무실이 지하철 역 근처에 수십 군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무실에는 적게는 30명부터 많게는 80명에 이르는 기아바이들이 소속돼 있다"며 "그렇지만 소속돼 있는 기아바이 모두가 매일 장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기아바이들은 하루 일과를 유통업체에서 시작한다. 장사를 나가기 전, 자신이 속해있는 유통업체에 들러 물건을 받는다. 자신이 팔고 싶은 물건을 직접 선택한다. 장사가 끝난 후, 다시 유통업체로 돌아간다. 팔았던 물건 개수대로 값을 지불하고, 남은 물건들은 반납한다. 유통업체가 취급하는 물건도 때에 따라 다르다. 지하철에서 인기를 얻는 상품이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간혹 동대문과 같은 도매상에서 직접 물건을 사서 장사를 하는 기아바이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드물다. 재고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통업체 물건이 도매가보다 높아도, 재고를 책임져준다는 장점 때문에 그곳에서 물건을 산다. 유통업체는 기아바이들이 지불하는 물건 값으로 사무실을 운영한다. 기아바이들은 하루 평균 6~10만 원 정도의 수입이 있는데, 수입의 절반 이상을 유통업체에 지불한다.
"유통업체로 가서 기아바이를 시작해보려고요. 1호선에 기아바이가 많던데, 거기서 기아바이를 하려면 사무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기자가 도매상에게 물었다. 그러나 도매상은 단칼에 "사무실에 가도 1호선에서는 못한다"고 대답했다. 유통업체와 별개로 기아바이들의 모임이 있기 때문이란다. 모임의 회원인 사람만 1호선에서 구역을 조정해 기아바이를 할 수 있다는 것.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장사를 하는 기아바이가 정해져 있어서 장사하고 싶어도 못해요. 상인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회비도 걷고, 구역도 정해서 장사하고 있어요. 기존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자기가 그만큼 못 파니까. 다른 사람은 아예 못 들어오게 하는거죠."그는 1997년 IMF 이후부터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사업이 망하고 갈 곳 없던 사람들이 지하철 상인의 주축이 되면서 회원제는 더 견고하게 굳어졌다. 새로운 기아바이의 진입도 쉽지 않다. 회원들이 만든 모임에는 관리자도 있고, 그들만의 규칙도 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 중에서는 1호선이 가장 규모가 크다. 구역은 기아바이에 따라 다르지만, ▲구로역-금정역 ▲금정역-수원역 ▲금정역-안산역 ▲회기역-의정부역 ▲회기역-서울역 ▲서울역-구로역 ▲구로역-인천역 등이 대표적이다. 도매상은 ▲구로역-금정역을 장사가 가장 잘 되는 구간이라고 꼽았다.
기아바이 회원들은 서로 정한 구역 내에서만 장사를 하고, 먼저 온 기아바이부터 순서대로 열차를 탄다. 기아바이는 하루 평균 두세 바퀴 정도 도는데, 사람이 많을 땐 두 바퀴도 돌기 힘들다.
기아바이들의 '한 바퀴' 기준은 출발역에서 장사를 시작해 다시 출발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구로역-금정역이 구역일 때, 구로역에서 출발해 금정역 도착, 다시 구로역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회원들의 구역에 침범하면, 누군가 따라다닌다"
기아바이들끼리 구역을 정했어도 구역 내에 속한 기아바이가 많아 하루 평균 장사를 못할 때도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기아바이의 유입에 민감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구역에 새로운 기아바이가 들어오면 방해한다. 기아바이들의 모임 안에 방해를 전담하는 회원이 있단다.
"예를 들어 학생(기자)이 회원들 구역에 침범해서 물건을 팔면 방해하는 사람이 따라다녀요. 상인 모임의 회원들 중 한 명이 전담해서 방해하는 거죠. 학생이 '이거 천원입니다, 사세요' 이렇게 말하면 그 회원이 옆에서 '저거 중국산이다, 불량이다, 사지 마라' 등의 말들을 하면서 방해하죠. 그럼 장사가 되겠어요? 안 되죠. 그렇게 회원들 구역을 방어를 하는 거예요. 방해를 전담하는 사람에게는 회원들이 낸 회비로 수고비를 주죠" 도매상은 내게 회원들을 피해 장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바로 새벽에 장사를 하는 것. 그는 "새벽에는 구역이 없고, 장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해도 괜찮다"며 "그땐 다른 장사꾼이랑 부딪혀도 상관없어, '왜 여기서 장사 하냐' 이런 말도 안 할 거다"고 말했다.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기아바이, 유통업체, 도매상을 각각 만났다. 이들은 '기아바이'에 대해 비슷한 얘기들을 했다. 그렇지만 현재 장사하는 기아바이의 수는 가늠하지 못했고, 유통업체 사무실의 현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아바이들이 활동하는 시간대, 장사하는 구역, 열차 타는 순서 등 그들 나름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아바이. 그들은 그들만의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김은희 기자는 <오마이뉴스> 17기 인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