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하철에서 출퇴근길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지하철 잡상인'은, 이들만의 전문 용어를 빌리자면 일명 '기아바이'다. 기아바이라는 용어는 굶주림의 '기아'(飢餓)와 판매의 '바이'(Buy)에서 따온 합성어다. 즉, 가난한 지하철 이동 판매상을 이르는 말이다. IMF 이후 급격하게 양상된 기아바이는 유통 업체에서부터 지하철 구역 간 회원제까지 운영하며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가난한 지하철 이동 판매상, '기아바이'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봤다. <기자말> "안녕하십니까. 가정은 평온하십니까. 추운 날씨에도 다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런 날에 무릎 시리지 않으십니까. 오늘 제가 소개할 상품은…" 지하철 역내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남자는 손수레 안에서 무릎 보호대를 꺼낸다. 그는 한 쪽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려 무릎 보호대를 직접 착용하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 보여주기도 한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그의 요란한 동작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남자는 무릎 보호대가 가득 담긴 파란색 손수레를 끌고 다음 칸으로 이동한다. 그는 지하철 마지막 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열차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플랫폼 기둥에 파란색 손수레를 세워 둔다.
플랫폼 기둥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손수레 3, 4개도 줄을 서 있다. 플랫폼 기둥에 서 있는 남자들은 손수레의 주인으로 보였다. 남자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오늘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손님이 너무 없다", "내가 세 번째 타임으로 들어가면 되냐"는 등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아바이들의 출퇴근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가 일반적이었다.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판매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 남자는 "기아바이는 사람이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못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우리만의 룰이 있어요"
지난 2월 19일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에서 만난 박태경(가명, 67)씨도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씨의 손수레에는 구두약이 담겼다. 박씨는 "우리도 우리만의 룰이 있다"며 "구역과 차례를 정해 움직인다"고 말했다. 구역과 차례를 정해 열차 내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다. 먼저 온 순서대로 차례가 정해졌다.
박씨의 구역은 구로역에서 금정역까지다. 구로역에서 금정역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한 바퀴 돈다"고 표현했다. 박씨는 "보통 (하루에) 적게는 3바퀴에서 많게는 5바퀴까지도 돈다"고 설명했다. 박씨의 말에 의하면 ▲ 회기역-의정부역 ▲ 회기역-서울역 ▲ 서울역-구로역 ▲ 구로역-인천역 등으로 1호선 지하철 구역이 정해져 있다. 구역 별로 모임도 정해져 있다.
"우리 구역끼리는 서로 사이가 좋아요. 누가 아프면 병문안도 가고, 정이 있죠. 모임 사람들끼리 손님한테 서비스하는 방법도 교육 받아요. 예를 들어 '밝게 인사하자', '서로 싸우지 말자', '한 칸에 3명 이상 타지 말자' 이런 내용이에요. 그래야 이 일도 오래하죠." 기아바이 간의 모임에 대해 묻자 박씨는 존재 여부는 인정했으나 구체적인 답변은 꺼렸다. 박씨는 "모임 안에서도 언론에 공개되면 좋을 게 없다는 반응"이라며 "월 회비 1, 2만 원을 걷어 다같이 식사를 하거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만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6명의 기아바이들 대다수가 모임에 대해 말을 아꼈다.
유통업체와 기아바이는 '악어새와 악어' "내가 많이 팔았으니까 그만큼 챙겨야지." "잘했어, 그럼 80개만 계산하자." 구로역 엘리베이터 안. 물건이 든 파란색 손수레를 끈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기아바이였다. 어디론가 이동하는 그들을 따라가 봤다. 남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OO유통'이라는 간판을 내걸린 사무실. 입구에 파란색 손수레가 여러 개 놓여있는 걸 보니 기아바이들이 물건을 받는 곳인 듯했다.
박태경씨는 이를 "유통업체"라고 칭했다. 박씨는 "예를 들어 유통 업체로부터 1000원 짜리 상품을 가져 오면, 팔고 나서 6:4 비율로 회사(6)와 본인(4)이 각각 나눠 가진다"며 "유통 업체에 '물건 가져간다'고 말하고 팔러 나가는데 총무(유통업체 담당자)가 일일이 세어 보지 않아 개수를 속이곤 한다"고 말했다. 기아바이가 물건을 판 만큼 유통업체와 나눠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아바이들이 사 온 물건은 대부분 중국산이었다. 지하철을 타는 서민들이 주 고객이다 보니 저렴한 물품을 팔아야 타산이 맞는단다. 박씨는 "금정역이나 구로역 주변에 유통 업체가 많이 밀집해있고, 나머지는 화곡동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가져온다"며 "나는 한 번에 구두약 2, 3박스를 동대문에서 받아 와서 며칠 동안 판다"고 말했다.
"이 바닥에서는 멘트가 중요해요. 우리 사이에서는 이걸 '단가를 친다'고 말해요.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요' 이런 식입니다. 서비스가 제일 중요해요. 사실 여기서 나오는 물건 99%가 중국산인데, 중국산이라 하면 안 팔리니까 말을 안 해요. '중소기업에서 나온 무슨 상품' 이것도 다 거짓말이에요. 그런 말이 들어가야 장사가 잘 되니까 하는 거죠. 국산은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쫓는 사람, 그리고 쫓기는 사람
같은 날 금정역에서 만난 신용호씨(가명, 40)는 인터뷰를 요청하자 손수레를 세우고는 재빠르게 대합실로 올라갔다. 단속하는 지하철 보안관을 피하기 위해서다. 철도안전법 50조(철도 차량 내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승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동을 사람 또는 물건에 대한 퇴거 조치)에 의해 지하철 상행위가 규제받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신씨의 주머니 사정은 말이 아니다. 올해부터 벌써 5차례 벌금 영수증이 집으로 날아 왔다. 보안관에게 적발된 횟수에 따라 금액이 올라간다. 첫 번째는 2만 5000원, 두 번째는 5만 원, 세 번째부터는 10만 원으로 부과되는 바람에 한 달 버는 돈의 절반은 벌금으로 나간다.
신씨는 "오늘 징그럽게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씨는 "사람들이 '그럼 노가다(일용직 노동자)라도 하지. 왜 이거 하냐'고 한다"며 "실제로 기아바이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과자거나 몸이 불편해 노가다도 못 나간다"고 말했다. 신씨 역시 대형 면허를 가지고 있어 운전을 하며 살 수 있었지만, 허리 디스크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거 파는 거 얼마나 쪽 팔리는 일이에요. 얼마 전에는 지하철에서 여동생을 만났어요. 여동생이 지하철 안에 주저앉아서 나를 잡고 엉엉 울더라고. '오빠, 왜 이런 거 하냐고'. 가족한테도 말 못하는 일이에요. 이게. 근데 어쩌겠어요.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든데."
열차가 회기역에 들어서자 한 남자가 들어온다. 한석훈(가명, 67)씨. 그도 기아바이였다. 손수레 가득 발열 덧신을 채워 들어 왔지만, 형광색 옷을 입은 보안관들이 들어와 "여기서 물건 파시면 안 됩니다"라며 그를 쫓아냈다. 한씨는 회기역에서 (의정부) 가능역까지의 구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몸이 아파 10일 만에 일을 나왔지만, 보안관의 등쌀에 못 이겨 오늘 하루 1만 2000원밖에 못 벌었다"고 하소연했다.
서울시에서 도입한 지하철 보안관은 지난 2011년 9월부터 열차 내 질서 유지와 범죄 예방을 담당하고 있다. 보안관들은 상행위를 하는 기아바이를 열차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채증(상행위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자료로 시청에 제출해 과태료를 부과)을 한다.
쫓기는 사람 못지않게 쫓는 사람의 마음도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지하철 2호선 담당 보안관 이홍철(가명, 36)씨는 "(저희는) 단속원인데 과태료 부과에 대한 항의를 하시면 많이 힘들다"고 토로했다.
"과태료 부과를 하려면 신분증을 봐야 하는데, 끝까지 신분증을 안 보여주시기도 해요. 자꾸 저항하시면 경찰을 부르는데, 경찰이 올 때까지 잡아둬야 해요. 그러는 와중에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침까지 뱉으셨어요. 우리 중에 그 분들을(기아바이) 고소하신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그 분들이 벌금형에 처해지기 때문에 요즘은 덜하긴 해요." '기아바이'들은 저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이처럼 단속을 해야하는 이유도 있다. 지하철 이용객들의 불편 호소가 그 첫번째 이유다. 실제로 승객들의 불편함을 듣는 서울 메트로(지하철 1~4호선) 홈페이지의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는 2011년 138건, 2012년 129건 기아바이에 대한 항의글이 올라왔다. 서울 메트로 관계자는 "통계가 나오진 않았지만, 기아바이 관련 항의 문자나 전화도 온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김다솜 기자는 오마이뉴스 17기 인턴기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