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현재, 한국에서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안으로 '마을공동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선언하고, 밀고, 짓는 토건국가'가 아닌, '소통하면서 서로를 살리는 마을을 만드는 돌봄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마을의 귀환' 기획은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지난해 8월 시작됐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한국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생생하게 조명하면서, '마을공동체가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습니다. '마을의 귀환' 기획팀은 <오마이뉴스> 창간 13주년을 맞아 민관이 협력해 '지속가능한 마을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는 영국식 마을공동체 만들기 모델을 찾아갑니다. [편집자말] |
[특별취재팀: 글 홍현진·강민수 / 사진 유성호]
[기사 수정 : 3일 오후 8시 43분]영국에 온 지 며칠 만에 화창하게 갠 날씨. 지난 2월 15일(현지시각), 런던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브리스톨(Bristol) 동쪽에 있는 바턴 힐(Barton Hill) 지역에 도착하자, 나도 모르게 계속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게다가 깔끔하게 지어진 고층 아파트, 초록빛 잔디밭,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죠?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내 생각을 읽었는지, 레베카(Rebecca·31)가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 지역에는 임금이 낮거나 정부지원금만 받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마약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저기 지어진 새로운 주택은 소셜하우징(임대아파트)입니다. 아이가 많을수록 소셜하우징 입주가 유리하니까 소말리아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소말리아 사람들은 2~8명까지 아이를 낳으니까. 아이가 9명인 집도 봤어요. 한국과 달리 영국 아파트는 보통 소셜하우징이라 질이 그리 좋지 않아요. 층간 소음이 심하고, 저 아파트는 한 동에 80가구가 사는데 세탁기는 2~3대밖에 없어요. 그런데 백인들이 보기에는 '우리는 집이 없는데 왜 소말리아 사람들만 좋은 아파트에 사나'라는 생각이 들죠. 거기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거예요."바턴 힐(Barton Hill) 지역은 브리스톨은 물론이고 영국에서도 '가장 쇠퇴한 지역 10%' 안에 들어간다.
광업과 화학 공장 부지가 있었던 이곳은 1930년대 경제공황의 영향으로 슬럼화됐고, 1950년대 슬럼가를 철거하고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커뮤니티가 붕괴됐다. 1980년대, 정부 주도의 지역재생이 시행됐지만 일시적이었다. 높은 실업률과 낮은 교육수준, 이에 따른 높은 범죄율이 계속됐다. 주로 백인 노동자들이 많이 살던 이 지역에 이주민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백인과 이민자간의 갈등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바턴 힐에서는 히잡을 쓴 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백인 남성이 인사해도 흑인 여성이 대답 안한 까닭
바턴 힐에 변화가 생긴 것은 10여 년 전인 1999년. 노동당 블레어 정부가 도입한 '커뮤니티 뉴딜'(New Deal for Community) 사업에 선정돼 10년 간 지역재생 예산을 지원받으면서부터다. 10년 간 약 5000만 파운드(27일 외환은행 공시기준 820억 원)가 투입됐다. 바턴 힐은 인구 45만 명 규모의 브리스톨 시티에 있는 한 지역으로, 인구는 6000명 정도다.
이 과정에서
바턴 힐 세틀먼트(Barton Hill Settlement)가 마을공동체 만들기의 '허브' 역할을 했다. 바턴 힐의 복지관인 바턴 힐 세틀먼트는 퀘이커 교도들에 의해 1911년 설립된 자선단체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레베카는 이곳에서 2011년부터 커뮤니티 오거나이저(Community Organiser)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마을활동가'다. 영국 정부는 2015년까지 전국에 500명의 커뮤니티 오거나이저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15일 오전, 바턴 힐 세틀먼트를 찾았다. 레베카는 건물 입구에 있는 한 공간을 가리키며 "알콜·마약 중독 치료센터다, 재활 치료하는 사람들이 매일 왔다 갔다 한다"고 설명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패밀리 센터가 보였다. 보육시설이 아니라 가족들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공간이란다. 레베카는 "미혼모나 이민자들이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등을 함께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바턴 힐 세틀먼트에서 커뮤니티 개발자(Community Development Worker)로 일하고 있는 루시(Lucy)를 만났다. 루시는 지난 10년간 이 지역에서 마을만들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설명해줬다.
"이 지역에 8개의 아파트가 있는데, 지역민들에게 문제점을 물어봤더니 안전에 대한 걱정이 많이 나왔어요. 걸어 다니기 무섭다는 거죠. 그래서 자기 지역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열쇠로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했어요. 환경 개선을 한 거죠. 덕분에 범죄율도 줄어들고, 사람들의 두려움도 줄어들었어요. 또, 이 지역에는 장기간 백인 노동계급이 많이 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흑인, 특히 소말리아인·폴란드인이 많이 늘어나면서 이미 있던 커뮤니티와 새로운 커뮤니티 간의 갈등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어요. 예를 들어, 나이 든 백인 남성이 나이 어린 소말리아 여성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어요. 소말리아 여성은 아무 대답을 안 해요. 백인 남성은 그걸 보고 '버릇이 없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알고 보니까 소말리아에서는 젊은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말을 걸 수 없는 문화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벤트를 통해서 이러한 문화를 서로 이해하는 거죠."자원봉사자만 100명... 주민이 '주체'로 참여하는 복지관
바턴 힐에서는 일주일에 모두 35개의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초등학생 가족모임·보육원 가족모임·무슬림 여성들의 점심 식사 모임·바느질 모임과 같은 친목모임부터 컴퓨터·사진·영어교육 수업 같은 실용적인 프로그램도 있다.
바턴 힐 세틀먼트가 다른 복지관과 다른 점은 주민들이 이러한 사회서비스를 제공 받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현재 바턴 힐에서는 주민 100명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루시는 "지난 10여 년간 저희가 노력한 것은 이 지역 커뮤니티가 모든 것을 이끌어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며 "예산도 주민들이 짜도록 하고, 세틀먼트의 모든 의사결정도 지역주민들이 할 수 있도록 이사회에도 지역주민들을 참여시켰다"고 말했다.
"만약 저나 레베카 같은 활동가들이 어떤 프로젝트를 만들려면 5분 만에라도 할 수 있지만 주민들이 역량을 가지고 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지역 주민들 스스로 프로젝트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현재 바턴 힐 세틀먼트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직원은 35명, 자원봉사자는 100명이에요. 자원봉사자들이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어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세틀먼트가 주민들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했다면 커뮤니티 오거나이저는 직접 주민들을 찾아간다. 레베카는 매일 바턴힐에 사는 주민들의 집 문을 두드린다. 똑똑. 그리고 묻는다.
"바턴 힐의 어떤 점이 좋나요?"똑똑... 매일 주민들 집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묻는다
사실 이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레베카가 장난끼 넘치는 표정으로 상황을 재연했다.
"똑똑. 안녕. 난 레베카야. 난 뭔가를 팔려고 온 사람이 아니야.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온 거야." 레베카는 조금은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에섹스(Essex) 출신인 그는 대학 졸업 이후 한국에서 4년 반을 살았다. 한국에서는 영어 교육 관련 일을 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는 레베카는 "청국장과 인절미가 너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태원의 시낭송 모임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2011년 8월 바턴 힐에 처음 온 이후, 레베카는 2012년 11월까지 약 1년간 500명의 주민을 만났다. 그리고 바턴 힐에 대해 좋아하는 점은 무엇인지, 걱정하는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레베카는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홍보 자료를 보여줬다. 'Are you thinking what they're thinking?(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당신도 생각하고 있나요?)'라고 적힌, 두 장으로 된 종이에는 레베카가 500명의 주민을 만나 직접 들었던 이야기들이 키워드로 정리돼 있었다.
바턴 힐의 좋은 점 안전함. 조용함. 친절한 사람들. 친구들과 가족들. 다문화. 패밀리 센터. 평화로운 공원.
바턴 힐의 걱정되는 점젊은이들. 커뮤니티가 없다는 점. 너무 많은 변화. 집이 충분하지 않음. 쓰레기. 마약.
레베카는 "사람들이 이 자료를 보면서 '아, 다른 사람들도 젊은이들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라는 걸 알게 된다"며 "그 다음에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바라는 점은 없는지, 어떤 아이디어가 있는지 물어본다"고 말했다. 이에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청소년 클럽' '커뮤니티 카페' '무료 영어 수업' '커뮤니티 이벤트' '더 많은 지역 권력' '더 많은 직업' '멘토링 프로젝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저렴한 놀이방'...이렇게 묻기만 하고 끝? 아니다. 레베카는 마을에 대한 주민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레베카는 한 소년이 마이크를 들고 뭔가를 읽고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지난해 여름 휴가 때, 릴라 공원(Lila Park) 근처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만났어요. 아이들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공원이 좋기는 한데, 놀 게 없어서 심심하다고.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구청에 놀이기구를 만들어 달라고 건의하기로 했어요. 지금 이 사진 속 친구가 구청에게 요청하는 선언문을 읽고 있는 거예요. 이 아이들은 주민 75명의 서명도 받아서 구청에 냈어요. 주민 모임이 9월에 열렸고, 구의원이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어요." 영국인 레베카와 소말리아인 사다의 프로젝트
레베카는 자신과 함께 프로젝트를 했던 소말리아 난민 여성, 사다(Saada·28)를 소개했다. 사다가 살고 있는 소셜하우징으로 들어가기 직전, 레베카는 남성인 유성호 기자와 강민수 기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소말리아인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닌 남자가 집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죄송하지만, 밑에서 기다려주세요." 하우드 하우스(Harwood House)라고 적혀있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사다의 집 문을 두드리자 8살 이스라(Isra)가 우리를 맞이했다. 레베카와 이스라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집 안에 들어가자, 이스라의 동생 타릭(Tariikh·5)은 <미스터 빈>을 보고 있다. 잠시 후, 소말리아 전통의상을 입은 사다가 거실로 나온다. 사다의 남편은 택시 운전기사다.
사다가 바턴 힐에 살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사다는 "무서웠다, (아파트) 앞에 게이트도 없었고, 남편이 아주 작은 차가 있었는데 오자마자 사람들이 유리창을 다 부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처음 왔을 때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사다는 바턴 힐 세틀먼트에서 영어를 배웠고, 보육자격증도 땄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묻자, 사다는 "이전에 비해 지역이 안전해졌고, 나 스스로 자신감도 올라갔다"면서 "지금은 모든 마을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베카는 "어제 이 집에 왔더니 사다가 영국 여성, 수단 여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면서 "사다는 사람들을 불러서 화합시키는 역할을 많이 한다"고 칭찬했다. 레베카와 사다는 지난해 영국 여성과 소말리아 여성이 모여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다문화 트레이닝 세션을 열었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함께 런던에 다녀오기도 했다. 국적도, 살아온 환경도 달랐던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레베카는 "지난해 했던 건 파일럿이었고, 학교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해보고 싶다"며 "그때는 내가 도와줬지만 이번에는 사다가 혼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다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청소년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할 일이 없으면 비행청소년이 된다"면서 앞으로 청소년 관련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일상이 투쟁인 사람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레베카는 동네에 지나가는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면서 안부를 물었다.
"지금 지나간 분은 줄리(July)에요. 원래는 자기 이름도 잘 못 쓰던 문맹이었어요. 그런데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축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펀딩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줄리가 편지 쓰는 것을 같이 도왔어요. 지금 줄리는 자신이 이러한 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이렇게 사람들을 활동가로 만드는 게 제가 하는 일이에요. 줄리의 아들은 행동장애가 있었는데, 바턴 힐 세틀먼트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레베카에게 커뮤니티 오거나이저 일을 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참여에 적응이 안 된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고. 그럴수록 정부지원에 의존하기가 쉬워요. 이메일도 사용할 줄 모르고, 구청에 전화통화를 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럼 구청에 제가 전화해서 '옆에 누가 이야기하고 싶다는데요' 말하고 바꿔주는 거죠.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일상 자체가 투쟁이기 때문에 다들 바빠요. 그런 사람들한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잡아주는 거죠.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지난해 음악 페스티벌을 함께 진행했던 여성분과는 30번도 넘게 만났어요. 이벤트 라이센스 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펀딩 받는 것까지. 그걸 한 번 해보고 나니까 자신감을 갖게 되더라고요."레베카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을 내다봤다. 흑인들, 하얀 무슬림 의상을 입은 사람들. '이 사람들이 한국에 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 때 쯤 레베카가 말했다.
"올해 아이를 낳고 싶어요.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오고 싶어요. 내 아이를 백인들만 있는 곳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요. 이런 다문화 속에서 키우고 싶어요." '친절한 레베카'가 다음에 한국에 올 때는 꼭 맛있는 인절미를 사줘야겠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 <영국의 지속가능한 지역만들기>(나카지마 에리 지음, 김상용 옮김, 2009년, 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