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7년 동안 NGO활동가의 가족으로서 살아왔고, 최근 2년여 동안 NGO 활동가로서 살았다. 어찌보면 남다른 케이스일지도 모르겠다. 계층이동이 안되는 사회를 상징하는 표본으로도 볼 수 있겠지. 27년 동안 NGO 활동가의 가족으로서 참 많은 불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NGO 활동가로 일하게 된 것은, 글쎄, 왜 일까?
정확한 집계는 알 수 없지만, 가족 중 한 명이 NGO에서 상근활동을 하고 있는 케이스는 아마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것도 투철한 신념을 바탕으로 싸워왔던 시대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직업을 유지한 사람은 더더욱 희귀하다. 최근에야 여러 가지 계기로 NGO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 세대들이 있지만, 그들의 부모 중 한 사람이 같은 직업을 가졌던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겠다. 나는, 그런 흔치않은 경우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글이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왜 나같은 사람이 없을까.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 볼 때, NGO 상근 활동가가 가장인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힘겹기 때문이다. 우선은 거의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나처럼 자식이 한 명인 경우는 그나마 부담이 덜 하겠지만, 한 명만 더 생겨도 생활의 부담은 막대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그 가정이 유지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돈으로는 깰 수 없는 가족의 끈끈한 유대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기실 반강제적으로 가장의 신념을 나눠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장이 걷고 있는 길이 험난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정의로운 일임을 가족의 구성원이 인정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가족은 분열될 수밖에 없다. 이웃집 형이 입다 작아진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을 수 있어야 하고,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여 알아서 공부를 잘 하거나, 홈 스쿨링등 대안 교육을 택해야 하며, 유행에 민감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암묵적 동조는 대개 가정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청소년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성인이 되어, 물질적 풍요 없이 유지되어 왔던 화목한 가족사가 실은 가장을 비롯한 구성원들의 적지 않은 희생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여기에는 약간의 시대적 변화도 한 몫 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운동권'이라 불리던 세력들이 NGO로 세련된 형태를 갖추던 시기에서는 개인의 정신세계에 대한 '신념'의 지배력이 막강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념'의 이름아래 기꺼이 개인을 희생하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자신의 화목한 가족사를 재현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신념'을 고집하며 물질적 빈곤을 감수하고 희생하는 삶은 자연스럽게 선택지에서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NGO 활동가가 되었다. 분명 나의 정신세계가 동세대인들 보다 구식이어서 신념의 이름으로 시민운동과 결혼할 작정이었거나, 화목한 가족사를 재현할 수 있는 배우자, 즉 희생의 제물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일 게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에 와서는 둘다 틀린 것으로 보인다. 나는 결혼을 계획하고 있고, 상대는 아주 '보편적인' 동세대인이다.
결혼 준비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하여, 신념의 크기가 줄어든다. 상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자니,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인연의 끈이 엷어져 가는 것이 두렵다. 모든 것은 신념이 나에게 충분한 물질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서, NGO 활동가로서의 자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자존심, 꿈이 희미해져간다. 그렇다고 이바닥 - 워낙에 다른 직업활동과 차별성이 강하다 보니 - 을 떠나는 일도 쉽지 않다.
한국의 NGO는 근본적으로, 구성원들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어느 정도냐면, 재정이 어려워 약속된 상여금이 지급되지 않는 것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야 한다. 사무처의 책임자는 경우 급박한 상황에서 차입금을 마련할 수도 없으면 자신의 사비를 차입금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인적 인프라가 좁다보니 이 단체의 활동가가 다른 단체의 임원으로서 책임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각종 회의를 감당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야 한다. 상급자의 그런 업무는 젊은 신입 활동가들에게 있어 본인의 미래상이다. 지켜보고 있는 것 만으로 기가 질릴 판이다.
게다가, 희생이 전제된 커뮤니티는 NGO 활동가의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가 동반되기에, 일반회사의 입사, 퇴사와 같은 흔한 절차가 단체와 개인 모두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동종 업계가 적다 보니 인적 저변이 빈약하고, 따라서 한 사람이 빠져 나갔을 때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경력자가 필요 없는 자리라고 하더라도, 누구든 선뜻 지원할 만큼 매력적인 직장도 아니다. 퇴사하는 입장은 어떤가? 경력이 오래되면 될수록 재취업이 불확실해진다. 경력이 짧고 아직 젊은 경우에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단체의 사정에 따라 인정상 후임자가 정해질 때 까지 하릴없이 뒤치다꺼리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따금씩 떠나는 사유에 대해서 솔직해지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열악한 현실들보다,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보편적인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 사람을 어떻게 평범하다, 비범하다 나눌 수 있겠느냐 마는, 적어도 이런 상황을 함께 공감할 만한 사람조차 찾기 힘든 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의 이름으로 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짓은 경험상 못할 짓이다. 그렇다고 무슨 물건 고르듯, 나와 비슷한 신념으로 희생할 준비가 된 그룹들에서 사랑할 사람을 찾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사랑과 결혼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멋대로 꿈대로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왔지만,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사랑을 하게 되었고 결혼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 고통을 모조리 NGO의 열악한 환경 탓으로 돌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소 원망스럽긴 하지만, 애초에 잘못은 선택한 나에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자연스럽게 사라졌어야 할 선택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나는 순진했고, 어눌했으며, 별다른 삶의 행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생각하면 그저 씁쓸할 뿐이다.
다시 5년을 보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NGO들이 데스 브레스를 토할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활동가들이 고통 속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떠 않고 외롭게 살아가게 될는지. 사랑과 함께 시작되는 희생의 역사는 언제쯤 멈추게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