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전 8시, 바다가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역전을 상상하고 도착한 삼척역은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시멘트 공장이 기차를 집어 삼킬 듯 위협하고 있다. 김밥, 라면, 샌드위치 등 스낵 코너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간다면 큰 오산이다. '멘붕'! 멘붕이 따로 없다.
바다열차(
http://www.seatrain.co.kr)를 타기 위해 1일 오전 9시에 출발하여 무려 10시간이나 걸려 오후 7시에 삼척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휴라고는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내가 바다열차를 알게 된 것은 장미란이 출연했던 <1박 2일> TV프로를 보고나서였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바다열차가 너무도 환상적으로 보였던 것.
특히 기차를 타고 국내여행을 처음 해본다는 장미란의 행복한 미소는 꼭 한 번 바다열차를 타보고 싶게 만들었다. 실제로 바다열차는 '기차타고 떠나고 싶은 곳, 1위'에 선정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1박 2일에 바다열차가 소개된 뒤로 휴일 날에는 표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다.
그 어려운 표를 그것도 연휴에 인터넷으로 겨울 턱걸이를 하여 떠나기 하루 전에 운 좋게 구할 수 있었다니 나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운이다. 누군가 표를 샀다가 취소를 한 모양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인터넷에서 표를 사는 행운이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바다열차표는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전 좌석 매진이었다.
그토록 타고 싶었던 바다열차! 그런데 삼척역사에는 흔해 빠진 편의점 하나도 없을뿐더러 역 주변에는 구멍가게도 없다. 보통 상식으로는 역전에는 먹거리가 풍부할 것으로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이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이다.
아침에만 반짝 열리는 시장... 바다열차 생긴 뒤로 활기
그래도 아침식사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코레일 근무 여직원에게 근처에 식당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 부근에는 식당이 없어 자기들도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다고 했다. 혹시 건너편 생선시장에 식당이 있을지 모르니 그곳으로 가보라고 하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역무원으로부터 표를 받아 쥐고 '번개수산'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시장으로 갔다. 이곳은 아침에만 번개처럼 반짝 열리는 시장이란다. 이런 곳에 번개시장이 열리다니 이 또한 상상초월 하는 풍경이다. 번개시장은 바다열차가 생긴 뒤로 조금씩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고 한다. 생선가게 아주머니에게 식당을 물으니 턱으로 골목을 가리킨다. 50년대에나 볼 수 있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80을 전후한 노부부가 앉아있다.
"아침 식사가 뭐가 있나요?""도루묵 탕과 간제미 탕이 있어요.""뭐요? 도루묵과 간제미 탕?"와아! 이거야말로 정말 상상초월 하는 아침식사메뉴다! 말짱도루묵과 간제미는 둘 다 아주 특별한 음식이 아닌가? "기차 출발시간은 30분 남았는데 시간이 되요?" "금방 끓어요."
아침부터 냄새나는 간제미를 먹을 수는 없고 해서 도루묵 탕을 시켰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 가서 '묵'이라는 생선을 먹고 하도 맛이 있어서 환궁을 하여 다시 먹었더니 피난시절 그 맛이 안 나서 '도로묵'이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해서 유래된 '말짱도루묵' 아닌가?
할머니는 정말 금방 도루묵 탕을 끓여왔다. 말짱도루묵도 배가 고프니 맛이 기가 막히다. 시장이 반찬! 그러나 삼척역에서 아침에 기차를 타려거든 아침을 먹고 오거나 준비를 해 와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도루묵으로 식사를 하고 삼척역으로 갔다.
8시 45분, 3량의 하늘색 바다열차는 무시무시하게 연기를 뿜으며 서 있는 동양시멘트 공장을 뒤로 하고 삼척역을 출발했다. 삼척역은 1991년 8월 20일 운행을 중지했다가, 2007년 7월 24일 삼척-강릉 간 바다열차가 운행을 개시하며 여객 취급을 재개했다.
바다열차는 총 3량으로 1호차(30석), 2호차(36석), 3호차(42석), 프러포즈 실(3실)이 있고, 커피와 음료, 과자를 파는 작은 스낵바가 있다. 삼척-강릉 간 58km의 동해안 해안선을 달리는 바다열차는 전 좌석을 바다방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요금은 특실 1만5000원, 일반실 1만2000원, 프러포즈 실은 5만 원(2인 1실)이다.
삼척역을 빠져나간 기차는 곧 삼척해변역에 도착했다. "와아~ 바다다!"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바다열차는 삼척역을 출발하여 삼척해변, 추암, 동해, 묵호, 정동진, 강릉역까지 총 58km를 1시간 20분 동안 달려간다.
흰 거품을 물고 부서지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마음 속 때까지 씻어 내려가는 기분이다. 다정한 연인끼리,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바다열차를 즐기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바다열차는 이사부사자공원을 지나 곧 추암역에 도착한다. 추암역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탔다. 촛대바위로 유명한 추암해변은 아름다웠다. "꼭 잊지 말고 추암해변을 걸어보세요." 역무원이 촛대바위가 있는 추암해변을 강력 추천한다.
"꼭 잊지 말고 추암해변을 걸어보세요"
기차는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겨울바다를 서서히 달려갔다. 마지막 겨울 추위를 보여주듯 바람이 거세게 부는 동해바다는 흰 거품을 문 거대한 파도가 연달아 부서진다. 아름답다! 산이 높아서 좋다면 바다는 넓어서 좋다. 누구나 다 포용해 주는 너그러움이 있어서 좋다. 어머니 품 같은 넉넉한 바다! 겨울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바다열차는 묵호항을 지나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철길을 한동안 달렸다. 잠시 지루할 것 같은 시간을 역무원은 빙고게임으로 채웠다. 전광판에 번호를 게시하면 빙고 판에서 번호를 눌러 좌우 열을 가장 먼저 뜯어낸 사람이 우승을 하는 게임이다. 빙고게임을 하는 동안 기차는 곧 정동진역에 도착한다.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한 정동진역이다. 정동진역에서는 잠시 내려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타임을 준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는 소리가 난다. 나도 바다를 향해 열심히 터뜨리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안녕하세요?""아니, 홍 선생님…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이른 아침 여행지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상상초월이다. 홍 선생님은 우리가 호주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사람이다. 여행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홍 선생님도 가족과 함께 오랜만에 바다열차를 타기위해 나들이를 했다고 한다.
바다열차는 정동진역을 출발하여 10시에 강릉역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삼척역에 세워두었기 때문에 10시 15분에 출발하는 청량리 행 무궁화를 탔다. 표가 매진되어 왕복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궁화호는 삼척역을 통과하지 않는다. 동해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삼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서 오는 바다열차 입석표를 팔면 어떨까? 가격을 좀 싸게 해서 좌석 뒤에 여유 공간에 탈 수 있을 만큼 입석표를 팔면 편리할 것 같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자동차를 출발한 역에 세워 두어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해역에서 삼척역까지 1만4000원의 택시비가 나왔다. 썰렁한 삼척역을 빠져나와 삼척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침에 삼척역을 찾느라 헤맸는데, 곰치국이라는 식당 간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그 곰치국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곰치국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아 그냥 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8시에 문을 연다는 것.
바닷가에 웬 곰치국일까? 나는 곰치국이 산에서 나는 곰치나물로 끓인 국인 줄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펄펄 끓여 들고 온 그릇에는 흐물흐물한 생선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꼭 순두부처럼 생긴 하얀 생선이 들어있는 곰치국은 산에서 나는 곰치나물국이 아니었다.
"호호,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지네요.""그게 여행의 참 맛이 아니겠소?"
정말 이번 여행은 상상초월로 시작해서 상상초월로 끝나는 여정의 연속이다. KBS, MBC, SBS 맛 자랑에 나왔다는 삼척해변 곰치국 집은 유명 인사들의 사인이 벽에 죽 걸려있다. 문어 등 무척추어류를 주로 먹고 산다는 못 생긴 곰치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입에 들어가면 순두부처럼 그냥 살살 녹는다.
곰치국으로 점심을 먹고 돌아 본 촛대바위! 이건 또 다른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바다열차 표를 살 때부터 생각지 못했던 일이 연속 일어났던 1박 2일 동안의 마지막 겨울 여행!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여행이었다. 정말 힘들고 아슬아슬 했지만 마음을 휑~ 하게 비우는 멋진 멘붕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