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3일 새벽, 쌍용차 대한문 농성장이 화염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연신 날아들었습니다. 인명 피해는 없다는 소식에 안도하며 이런저런 핑계로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대한문에 도착했습니다.
현장은 사진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우 지부장이 41일 동안 단식을 하며 누워있던 천막과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해 강정마을 평화활동가들,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함께했던 '농성촌' 천막은 완전히 잿더미가 돼 있었습니다.
평소 장난기가 많았던 젊은 조합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김정우 지부장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지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농성장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오전 5시 30분 무렵 발생한 화재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폐허가 된 농성장 주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천막 안에서 화마를 피해 목숨을 건진 쌍용차 조합원들을 찾았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병원에 갔습니다.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더니 천막에서 미처 휴대전화를 챙기지 못하고 몸만 빠져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병원에 함께 간 선배에게 "그냥 취객이 담뱃불을 던져서 불이 일어난 거라면 모르겠지만, 계획된 방화라면 앞으로 무서워서 어떻게 분향소에서 잘 수 있겠냐"고 말하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먼저 잠에서 깨어 불이 일어난 것을 알았던 다른 조합원은 수사 중이라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의 양해를 받아 화재 현장에 들어가더니 불에 탄 지갑을 들고 나왔습니다. 타다 만 만 원짜리 몇 장과 녹아버린 카드를 꺼내는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는 3분의 1쯤 타버린 지폐를 은행에서 교환해주는지 물으며 조심조심 비닐 봉투에 담았습니다. 다행히 그가 깊이 잠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850만원 재산피해? 그 이상이다어느 종편 방송사는 아침 일찍부터 카메라를 화재 현장에 들이댔습니다. 한 보수신문의 기자는 쌍용차지부 김정우 지부장의 인터뷰 거부에도 끈질기게 주위를 맴돌며 취재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계 조작으로 하루아침에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24명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고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렸던 지난해 4월 5일부터 이날까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견뎌내며 지켜낸 333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동료들을 잃지 않겠다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과 절규와 땀방울이 스며있는 농성장은 그 자체로 보물입니다.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발걸음을 보냈던 노동자·시민·학생·종교인·문화예술인 등 수많은 이들이 건넨 농성 물품 하나하나는 문화재였습니다.
쌍용차 농성장 화재에 관련해 850만 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났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850만 원의 재산 피해라니요? 8500만 원, 아니 8억5000만 원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석과도 같은 마음들이 담긴 물품들이 있었고, 333일 동안의 가슴 아픈 기억들이 있었습니다. 한 예술가의 작품도, 어느 스님의 법회 소품도, 어린 학생들의 편지도 화마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린 시절 몇 달을 모아 감춰뒀던 딱지가 아궁이에 던져져 재로 변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의 편지를 모아둔 박스가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분향소를 지켰던 이들의 마음의 집이 불타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잿더미로 변한 농성장과 불타버린 영정을 바라보는 해고자들의 슬픔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보수언론의 여론몰이 '불법천막 방치 문화재까지 훼손'
그러나 보수언론의 카메라는 노동자들의 눈물을 비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렌즈는 그을린 덕수궁 담장과 서까래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문화재의 훼손을 걱정하는 덕수궁 관계자와 "더 이상 시위용 천막을 세우지 못하게 하겠다"는 서울 중구청장의 말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됐습니다.
'불법천막 방치 문화재까지 훼손'이라는 여론몰이는 쌍용차 천막을 넘어 전국에서 혹한을 견디며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의 농성장 전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는 예상대로 "하마터면... 대한문·덕수궁 화마 입을 뻔"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농성촌에서 구청 직원들을 접근조차 못하게 해, 천막이 화재에 취약한지 아닌지를 점검할 수 없었다"는 중구청 관계자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농성 철거'를 압박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난 11개월 동안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경찰에게 맞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발걸음을 보탠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잿더미가 된 농성장을 지켰습니다. 분향소를 복원하고, 24분의 영정을 다시 모셨습니다.
방화 용의자가 검거됐습니다. 경찰은 용의자가 길을 지나가다 지저분한 천막이 있어서 불을 질렀다고, 농성장에 반감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종로의 사우나에서 생활하며, 환경미화 아르바이트를 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그러나 쌍용차 노동자들은 지난 4일 기자회견을 통해 방화 용의자에 대해 공익변호사 단체에 무료 변론을 요청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 방화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고,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지만 정리해고로 쫓겨난 사회적 약자로서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방화 용의자가 정보기관이나 보수우익단체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니라면 방화에 대해 선처를 요구할 것입니다."쌍용차 분향소가 복원된 날 박근혜 정권의 초대 고용노동부장관 방하남 내정자는 국회 청문회에서 "쌍용차 사태가 가진 노동적·사회적 측면이 있다"며 "장관으로서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정리해고자나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명예퇴직자들을 고용안정이나 생활안정 차원에서 챙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야 대선후보들의 공약이었던 쌍용차 국정조사에 대해 "쌍용차 국정조사와 관련해 여야 간 논의되는 결과를 지켜보겠다"며 유보 입장을 밝혔습니다. 장관 후보자가 밝힌 정리해고자나 명예퇴직자의 고용안정은 약속한 대로 국정조사를 실시하는 것이며, 해고자들을 모두 복직시키는 것입니다.
쌍용차 문제 해결, 답은 박근혜 대통령의 입에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2012년 6월 16일 '쌍용자동차 희생자 범국민대책위원회'와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6·16 희망과 연대의 날. 함께 걷자, 함께 살자, 함께 웃자' 행사에 참가해 쌍용차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해고자들의 복직을 촉구했다는 이유로 행사 참가자들에게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보냈습니다.
서울 여의도공원을 출발해 대한문 분향소까지 가족들 손을 잡고 평화롭게 진행된 '희망걷기' 행사에 대해 검찰은 "교통을 방해했다"며 '일반교통방해'로 기소, 벌금 300만 원을 부과한 것입니다. 억울한 해고노동자들과 연대의 발걸음을 보탰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법원에 불려다니고 큰 액수의 벌금을 물어야 할 상황입니다.
쌍용차 희생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하고, 연대한 이들에게 벌금을 물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잿더미가 된 농성장 속 연대의 흔적은 다시 밀려드는 연대의 손길로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습니다. 소화기에서부터 카메라까지 전국에서 연대의 물품들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의 말처럼 쌍용자동차 사태는 바로 '사회적 문제'입니다. 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26일 전경련을 찾아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영의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구조조정이라든가 정리해고부터 시작할 게 아니라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지혜와 고통 분담에 나서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퇴출시키는 고용 행태는 앞으로 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년까지 일할 수 있도록 기업에서 좀 더 노력해주시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프레시안>, <레디앙>, <참세상>에도 송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