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7월, 장경희(32) 감독은 신문을 훑어보던 중 기사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가 인천 송도로 이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신문을 덮고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더라고요. 그때는 왜 우는지 이유를 잘 몰랐죠."장 감독은 그때부터 학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7개월 뒤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됐다. 박문여자고등학교(인천 동구 송림동) 이전을 소재로 한 <동구 밖>이 바로 그것.
<동구 밖>은 영화공간 주안에서 3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작은영화제 인-필름(In-Film)'에서 7일과 8일 이틀 동안 상영된다. 영화제를 일주일 앞둔 지난 2월 27일, 박문여고 근처 커피숍에서 장 감독을 만났다.
정체성 담겨있던 '마을'을 조명하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송림동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의 부모는 송림동 현대시장에서 오랫동안 정육점을 운영했다. 남들은 이 동네를 두고 낙후됐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오전 8시가 되면 집 앞으로 순두부 파는 아저씨가 지나가요. 요즘은 조금 늦어져 오전 8시 10분에 지나가시는데, 이 소리가 우리 집 알람이죠."평범한 일상이 흐르던 동네에 지난해 7월, 현수막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박문여고 이전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이다. 현수막이 늘어갈수록 그의 마음도 술렁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학교 이전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제가 자꾸 울더라고요. '마음이 자꾸 울컥하는 걸 보니 이 일이 내게 중요한가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중요한 것이니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연출을 전공한 장 감독은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었다. 현수막을 시작으로 버스정류장과 시장골목·학교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자신이 성장해온 이 동네가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이 동네를 빼놓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부족함 없이 컸다고 생각했지만, 시장에서 노동자와 상인들 틈에 섞여 자라는 사이 '나는 약자'라는 의식이 생긴 것 같아요. 제 정체성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 거죠. 촬영을 하면서 드디어 내 위치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게 됐죠."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물결에 감동... 삶의 방식 바꿔놔장 감독은 고등학교 때부터 세상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마도 약자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학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졸업 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엑트'에서 독립다큐 제작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바로 등록했다. 막연히 방송국 피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막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에게 때마침 운명처럼 커다란 사건 하나가 밀려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였다.
"첫 강의를 들은 다음날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들렸죠. 그때 미디엑트가 광화문에 있었는데(현재는 마포구 상암동) 수업 때문에 오가면서 추모를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을 봤어요."그가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그때, 그의 손에 교육을 위해 쥐어진 카메라 한 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책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 서니 가슴 속에서 꿈틀대는 게 느껴졌어요. 그땐 카메라 작동법도 제대로 몰랐죠. 그런데도 이런 장면을 기록하는 게 다큐멘터리 만드는 사람들의 임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뭉클했죠."그는 교육과정 중 촬영 실습을 위해 난생 처음 참석한 큰 규모의 집회장을 회상하며 "전투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긴장되고 떨렸지만, 이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카메라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왜 힘없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고 했다.
"어떻게 먹고 살 건지, 내게 예술적 재능이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었어요. 제가 사는 방식이 바뀌는 계기가 됐죠." 그는 이듬해 다큐멘터리 연출을 배우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든 타임캡슐은 어디로?
<동구 밖>은 장 감독의 졸업 작품이다. 여기엔 학교 이전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동구에 마지막 남은 여자 인문계 고등학교가 사라지게 된 상황을 걱정하는 주민들과 이전을 해야 한다는 학교 쪽 입장 그리고 박문여고 재학생이 바라보는 이전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장 감독의 세 친구들이다.
그들은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며 타임캡슐을 만들어 담임선생님에게 맡겨뒀다. 10년 후에 찾으러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분주한 일상 탓에 어느새 10년 하고도 몇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친구들은 타임캡슐을 찾기 위해 오랜 만에 모교를 방문하면서 학교에 스민 옛 추억들을 떠올린다.
장 감독은 <동구 밖>을 통해 도시개발을 비판하려는 것도, 학교 이전에 무작정 반대하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신도시나 원도심이나 모두 인천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억지로 좋거나 나쁘게 포장할 필요는 없죠. 다만, 재정이나 행정 지원과 관심이 한 쪽으로만 쏠리는 건 싫어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누군가는 들어야죠. 박문여고만이 아닙니다. 신도시에 들어서는 새 학교에 왜 새로운 이름을 붙이지 않을까, 다른 곳에 있던 학교를 굳이 이전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그는 마지막으로 "제 역할은 영화를 완성하는 데서 끝난다고 생각한다"며 "이후는 관객의 몫"이라며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을 남겼다.
"박문여고를 다니는 후배들 손에 카메라를 들려주고 싶어요. 학교를 추억으로 간직할 마지막 아이들이 직접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잖아요. 그것을 계기로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과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