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05년 전인 1908년 3월 8일, 1만5000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여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에 따라 결의됐다. 이후 꾸준히 여성들의 국제 연대 운동이 활발해졌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작년에는 여성 20대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남성을 앞질렀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2013년에 비로소 우리나라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왔지만, 세계로 넓혀보면 이미 오래 전에 국가 최고 수반에 여성이 자리매김했다(1974년 아르헨티나의 세계 최초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 세계적인 지도자 반열에 오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1980년대 영국에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있었다. 이제는 최초의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해진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의 물꼬를 트다
이런 거대한 물줄기의 물꼬를 튼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계기로 시작된 것일까. 일명 '신여성'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히 그 엄청난 영향력으로 '신여성' '페미니즘'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 있다. 북유럽 노르웨이의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희곡의 주인공 '노라'이다.
지난해 출간된 책 <아내의 역사>(매릴린 옐롬 지음, 책과함께 펴냄)의 부제는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읽기"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지만 <인형의 집>의 노라가 출현하기까지는 여자는 한 인간, 한 개인이기에 앞서 아내와 엄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재산에 불과했던 적이 있었다. 재산의 일부로 취급됐던 아내(여자)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지금이 되기까지의 생생한 발자취를 그린 책에서 <인형의 집>의 노라가 차지하는 비율은 가히 절대적이다.
또한 노라는 한 여성의 꿈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여자이자 중국의 마녀로 일컬어지는 '장칭', 그녀는 어릴 때 극단에 들어가 음악과 연기를 배우면서 <인형의 집>의 노라를 좋아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모든 걸 뒤로하고 집을 나가버리는 노라의 모습에 반한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은 가출하기 전의 노라처럼 마오쩌둥의 아내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희곡 속 노라의 발자취는 어떻기에 이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120여년 전인 1879년에 만들어진 짧은 3막 희곡이 왜 지금에까지 계속해서 읽히고 리메이크되고 초연되는 것일까. 여성해방의 원전이라 평가받으면서도, 결혼과 가정을 파괴한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 작품을 들여다보자.
무엇보다 우선 내가 하나의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해요
노라는 곧 은행장이 되는 변호사 남편을 둔 화목한 중산층 가정의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따뜻하기 그지없는 엄마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크나큰 걱정이 있었다. 한동안 남편이 죽을 정도의 병에 걸려 요양이 필요했을 때, 그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돈을 빌렸어야 했다. 하필 그때 돈을 빌렸던 사람이 남편이 은행장이 되자 부하 직원으로 들어왔다. 그 부하 직원은 평판이 좋지 않은 데다가, 노라가 그 사람의 존재를 모르고 친구의 일자리를 남편에게 부탁하게 됐다. 남편은 부하의 자리에 노라의 친구를 앉히려 했는데 부하가 반발을 한다.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데, 사실 그 부하 직원으로부터 노라가 돈을 빌릴 때 약간의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보증인에 아버지를 세웠는데, 보증을 설 당시에 이미 아버지는 죽고 없었고 노라가 임의로 서명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부하는 이를 빌미로 노라를 압박했고 이 사실을 편지로 써서 노라의 남편에게로 보낸다. 노라는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얼마나 화를 낼지,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말이다. 노심초사하는 노라에게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노라의 남편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노라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이중적인 얼굴을 내비친다. 노라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도, 남편은 그 사실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남편을 더 생각한 아내(노라)와는 달리 남편은 자신의 체면과 지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가정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그 모습에 노라는 큰 상처를 받고 마음을 굳힌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 아이의 어머니기에 앞서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인형의 집'을 나선다. 그녀는 아빠와 남편에게 인형에 불과했고, 그녀의 아이들은 그녀와 남편의 인형에 불과했다.
노라 : 무엇보다 우선 내가 하나의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해요. (중략)노라 : 단지 재미있었을 뿐이죠.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잘해 줬어요. 하지만 이 집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가두어 두는 놀이터에 불과할 뿐이에요. 여기 있는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인형이죠. 아빠가 날 어린 인형으로 취급했던 것처럼요. 바꿔 말하면, 내 아이들 역시 내 인형이죠. 아이들과 놀면 재미있듯이 당신이 나에게 와서 놀아 주면 즐거웠던, 그게 우리들 결혼 생활이었어요, 토르발. (중략)노라 : 나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 난 완전히 독립해야 해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예요.(본문 중에서)여성의 문제는 인류의 문제
이 작품은 여성 운동의 물꼬를 틀고 이 책이 있기 전과 그 이후를 구분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지협적인 평에 불과하다. 저자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그는 여성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문제와 같은 것이라며 보편적인 인간성을 묘사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남과 여를 따로 떼어내 생각하지 않았고 평등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여성의 문제가 특수성을 가진 좁은 의미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인 인류의 문제라고 선언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또한 극 중에서 노라는 여성 이외의 사회적인 문제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는 종교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겠어요"라며 종교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게 어기게 된 법의 효용성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에서의 남편과의 대화에서는, 왜 여자는 아내와 엄마로서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작품의 저자를 데려다 놓고 이 작품의 진짜 의도가 뭔지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작품의 해석을 너무나도 과도하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우선 내가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노라지만, 남편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말도 한 노라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남편이 자신보다 노라를 더 생각해서 감싸줬으면 하는 생각 말이다. 이 점을 보면 분명 그녀가 한 말에는 인류사적 문제의 논의가 있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갈망에서 나오는 말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작품에 나오는 상징성만을 너무 과도하게 '이용'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결혼한 여자는 대부분 엄마이자 아내로서만 존재한다. 그녀들이 이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반면에 남자들도 결혼한 후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그녀들을 아내이자 엄마로 밖에 보지 않는다. 그들이 이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노라처럼 집을 나가라는 말일까? 아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그린 노라의 독립 실패처럼, 단란한 가정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파괴할 수 있는 여지도 다분히 있다.
기존의 관념에서 탈피해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현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옛날보다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 또는 현대 시대에는 당연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말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깨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노라가 말하려는 바를 여성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확장시켜 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지음, 김창화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10년 5월(18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