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방어선이 이미 무너졌습니다. 곧 2차 방어선도 무너질 것 같아요.""이 저지선이 무너지면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될 겁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막는 겁니다."낙동강 전선 이야기가 아니다. 16일 오전 10시, 울산 동구 방어동의 한 도로가에 마련된 천막농성장에서 이 지역 동네슈퍼 주인들이 한 말이다.
이곳에는 지난 2월 25일 홈플러스가 '익스프레스 방어동점'을 기습 개점했고, 현재 동네슈퍼와 지역 중소상인단체가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농성의 목적은 '익스프레스 방어동점'이 자진 폐쇄하는 것이다.
현재 이 지역 동네슈퍼에는 일제히 '익스프레스 폐쇄'를 위한 주민서명용지가 비치되어 있고, 지역 중소상인단체는 홈플러스 불매운동을 진행중이다. 한참 영업을 하고 있을 시간에 그들은 왜 농성을 벌이고 있을까.
동네슈퍼 주인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건 사회 정의에 어긋나"지난달 25일 울산 동구 방어동에 300㎡ 규모의 SSM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방어동점'이 개점했다. 하지만 홈플러스 측은 개점 3일 전인 22일에도 관할 동구청의 문의에 '출점 계획이 없다'고 답한 바 있어 동구청장이 이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특히 개점 12일만인 지난 8일에는 익스프레스 방어동점 바로 옆에서 오랫동안 영업해오던 동네슈퍼마켓 주인이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간판을 내리고 폐업했다(관련기사
SSM 개점 12일 만에 바로 옆 동네슈퍼 '폐업').
동네수퍼 주인들은 한결같이 홈플러스 측이 약자를 가벼이 여긴다고 성토했다. 근처에서 '디스카운트슈퍼'를 운영하는 정종삼(42)씨는 "어릴 때 강자가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배웠고, 지금은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홈플러스는 강자이면서 오히려 약자를 괴롭히고 있다"며 "대기업의 횡포를 직접 경험하니 우리 사회의 현실을 알겠다"고 말했다.
현재 관할 동구청장도 중소상인들과 함께 홈플러스 측의 횡포를 규탄하고 있다. 정종삼씨는 "이 일이 있기 전에는 그 흔한 촛불 한 번 들어보지 못했고, 동구청장도 이번에 누구인지 처음 알았다"며 "구청장도 이렇게 중소상인을 생각하는데… 대기업이 치사하고 옹졸하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지난 2008년 인근 동구 일산동에 홈플러스가 들어선 이후 최 인근에 있는 동네슈퍼들이 거의 아사 직전이라는 것. 그는 이들 슈퍼를 1차 저지선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2차 저지선으로 불리는 방어동 지역 슈퍼들도 홈플러스 개점 후 30% 이상의 매출 감소를 맞고 있는데, 익스프레스 방어동점까지 개점해 그 위기가 더 고조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당장 익스프레스 방어동점 바로 옆 슈퍼가 문을 닫았고, 인근 18개 슈퍼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며 "비단 슈퍼 뿐 아니라 다른 품목의 골목 가게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현재 홈플러스가 서울 뚝섬 2호점과 이곳 방어동점을 첨병으로 내세워 곧 수백개의 익스프레스를 전국에 세우려 한다고 들었다"며 "우리가 지금 막지 않으면 전국의 골목 슈퍼들도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네슈퍼 물건 대는 소·도매상 "동네슈퍼 죽으면 우리도 같이 죽어"
고남순 울산중소상인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2008년 개점한 홈플러스 동구점이 현재 하루 매출 약 2억 5000만원 가량, 연간 8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며 "결국 지역 중소상인들의 매출분을 가져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중앙차원에서 진행되는 상생합의를 무시하고 동구청 마저 속이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는 즉각 영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께 농성을 벌이고 있는 도매상 김아무개씨는 "동네슈퍼 매출이 줄어들면 자연히 물건을 공급하는 소·도매상들도 같이 죽는 것"이라며 "홈플러스야 자기들이 들어오는 곳이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죽자 살자 농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익스프레스 방어동점 출입구에는 동네 슈퍼에 물건을 대는 소·도매상들의 차량이 막아서고 있었다.
동네 슈퍼들에 따르면, 차량 시위와 농성을 두고 현재 홈플러스 측이 업무방해 등으로 고발할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종삼씨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익스프레스 방어동점이 스스로 문을 닫을 때까지 끝까지 농성해 저지선을 방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점상과 공생하던 골목상가, 대기업 SSM에 저항
이 지역 골목 상인들이 '상생'을 외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1·6장(매월 1자와 6자가 들어가는 날 서는 장)과 토요장이 열려 노점상인들이 활발히 영업을 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 지역 상인들이 노점상 영업을 막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종삼씨는 "장날 노점이 들어서면 손님이 몰려 골목 상가들도 이익"이라며 "노점상과 골목상가가 공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 16일은 1·6장과 토요장이 겹치는 장날이었다. 이날 이곳 문현장에는 노점상 백여 명이 천막을 치고 갖가지 물건을 준비해 손님을 맞고 있었다. 하지만 동네슈퍼들과 서로 대화도 나누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 익스프레스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노점상들도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날 장에서 과일을 팔던 김익선씨는 "지금까지 이 동네 상가들과 서로 도우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며 "얼마 전 바로 위에 익스프레스가 들어섰고, 앞으로 더 많은 SSM이 온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디스카운트슈퍼 정종삼씨는 "우리가 지금 익스프레스를 막지 못하면 앞으로 롯데와 이마트도 가만이 있겠나, 분명히 SSM을 내려고 할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전쟁상태와 같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