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면서 가족들에게 '아빠 갔다 올께, 여보 저녁에 봐' 했던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합동분양소가 차려진 전남 여수시 신월동 여수장례식장에서 가장을 잃은 한 유족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어느 죽음이 울림이 없을 수 있을까마는 이제 한창 인생을 꽃피울 30대 중반에서 갓 40을 넘은 망자의 죽음 앞에 장례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365일 교대근무로 연속공정이 이루어지는 여수산단. 이곳은 항상 대형사고의 위험이 산재해 있다. 지난 14일 여수산단 내 화학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 공장은 정기보수작업을 위해 저장고를 모두 비운 대림산업 HDPE1공장이었다.
사고가 나자 직원들을 비롯 주주사 자체 소방기동대가 출동해 10여 분 만에 화재진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원인 모를 잔존 가스에 의한 폭발의 충격은 너무도 컸다. 이날 하루 만에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 현장에서 일하던 11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작업자는 응급차에 실려 속속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여수시내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은 또 다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현재 여수 지역에서 치료가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후 광주(3명 광주굿모닝병원)로 긴급 후송되었다. 얼굴과 목, 가슴 부위에 2도 이상의 화상을 입은 문씨(54세)등은 상태가 상당히 위중해 신속히 광주의 화상치료 전문병원으로 옮긴 것.
병원 측은 "중상을 입은 피해자 대부분이 문씨처럼 화상을 크게 입어 자칫 치료가 늦어질 경우 생명까지도 위급한 상황이다"고 전했다. 특히 위중한 환자는 또 다시 차를 타고 서울(2명, 서울한강성심병원)로 옮겨가야만 했다. 초주검 직전의 환자가 치료를 위해 3번 응급차를 타야 했던 것. 병원을 옮겨 다니느라 약 이틀 동안 심한 화상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그들. 여수 지역 내에 화상전문병원 하나만 있었더라면 악몽 같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을 텐데.
광주로 서울로... 세 번이나 응급차를 타야 했던 부상자들
문제는 이 같은 사고가 날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있어 왔다는 것. 16일 여수 건설노조의 규탄결의대회에 참석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도 이 같은 현실을 꼬집었다.
"많은 화상환자들이 발생해도 여수에서 화상치료를 받지 못하고 광주로, 서울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국가산단인 여수에 '화상전문병원'과 '산재전문병원'을 반드시 요구하겠다."국내 최대 석유화학단지인 여수산단. 이곳의 2011년 한 해 매출액은 89조6139억 원, 수출액은 347억8000만 달러이다. 투자가 늘어난 지금은 매출액이 100조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 입주 기업만 273개사, 노동자는 1만7591명이었다.
유가증권과 코스닥 상장 기업 중 외부 감사 법인을 대상으로 한 매출액과 자산 총계 기준으로 순위를 정한 국내 1000대 기업 가운데에는 여수산단 입주 주요 업체인 GS칼텍스(3위), LG화학(18위), 호남석유화학(50위), 여천NCC(54위), 대림산업㈜(58위)에 이어 한화케미컬, 제일모직, 금호석유, 삼남석유, 남해화학, 휴켐스, 금호미쓰이화학, 금호폴리켐 등이 들어 있다.
여수산단에는 정유공장과 대규모 화학공장이 밀집해 있다. 또 전체 273개사 중 52개 업체가 불산, 염산, 페놀, 포스켄 등 각종 유독물을 취급하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정유공장의 폭발사고는 끔찍했다. 이처럼 정유공장을 비롯 NCC공장과 BTX공장, 그 원료로 제품을 만드는 다운스트림(HDPE. LDPE, PP, LLDPE) 공장은 사고 발생 시 대규모 재산 및 인명피해가 우려된다. 이곳에서는 최근 3년간 화재, 폭발 등 26건의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가 나면 십중팔구는 '화상환자'다. 이번 사례에서 보듯 생명을 건진 5명은 화상으로 인해 중태다. 장치산업의 특성상 파이프 라인에 흐르는 유체는 고온이다. 고압의 스팀과 탄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유기화합물인 하이드로카본(hydro carbon)이 쉴 새 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또 산단 바로 맞은 편에는 용광로를 취급하는 포스코 광양제철 공장이 있다.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참사로 이어질 것이 뻔하지만 국가기간산업인 여수산단과 광양만권에 화상전문병원은 하나도 없다.
십중팔구 화상환자... 화상전문병원 조속히 건립해야
그동안 공장 폭발 사고가 있을 때마다 여수 지역에 '화상전문병원'을 서둘러 설립해야 한다는 지적은 계속 이어져왔다. 오죽했으면 노동조합 임원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조차 산재전문병원과 화상전문병원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을까? 이렇다 보니 정치권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단골메뉴도 바로 이것. 하지만 당선과 동시에 공약(空約)으로 사라져 노동자들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불산사고 여파로 지난 1월 16일 주영순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여수산단 내 GS칼텍스 공장을 둘러보며 유독물 취급 관리실태 긴급 점검에 나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인 주의원(새누리당 전남도당 위원장)은 환경부, 전남도, 여수시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과 함께 여수·광양산단을 둘러봤다.
주 의원은 "화학물질 사고는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어 취급업체의 100% 안전기준 이행 여부와 안전관리 실태 및 방재장비 보유 등을 철저하게 점검하고 사고를 사전에 예방해달라"고 당부하며 여수시 건의사항을 경청했다.
이날 여수시 김양자 환경복지국장은 "여수산단은 연간 10여 차례 이상 화재 폭발 사고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지만 화상전문병원이 없어 2차 피해를 키운다"며 여수에 화상전문병원 설립을 요청했다. 지역 시민단체도 "민간에서 화상전문병원 설립이 어렵다면 중앙정부와 여수시가 협의해 공공병원으로 화상전문병원을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여수산단의 화상전문병원 건립에 정치권이 발벗고 나서길 바란다. 이번 사고로 6구의 건설노조원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합동분양소에서 흘러나온 한 간부의 탄식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국가산단이면 뭐해! 이놈의 여수는 화상 치료병원 하나 없이 초상만 치르는 장례식장이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