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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져온 듯한 야채. 채집을 좋아하는 큰시누이는 세심하게 들여다봤다.
▲ 라오스 새벽시장 집에서 가져온 듯한 야채. 채집을 좋아하는 큰시누이는 세심하게 들여다봤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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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있는 곳에 정식 판매대가 있는 곳과 좌판으로 나뉘어 있다.
▲ 라오스 새벽시장 지붕 있는 곳에 정식 판매대가 있는 곳과 좌판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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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내 무겁다고 짐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는 자꾸 뭔가를 사들였다. 식구 여섯이 왔는데 조카 서연과 꽃차남, 남편은 신발을 샀다. 나는 바지를 사 입고, 큰시누이는 핸드백을 샀다. 장사하는 분들이 먹어보라고 건네 준, 처음 보는 견과류와 과일을 샀다. 남편은 물건 값을 깎으려고 했지만 큰시누이가 정색하고 말리는 바람에 머쓱해졌다.

라오스 새벽시장은 우리 식구에게는 맞춤 장소였다. 육식인이 된 지 오래인 큰애는 닭튀김과 소시지 구이 앞에서 멈췄다. 얼굴의 기미를 없애는 시술을 하고서도, 쑥과 고사리를 끊었던 채집인 큰시누이는 온갖 푸성귀들을 살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서연은 장사하는 부모를 따라온 애들과 눈을 맞추느라 쪼그려 앉았다.

육식인인 큰애는 닭튀김 앞에서 군침을 삼키고...
▲ 라오스 새벽시장 육식인인 큰애는 닭튀김 앞에서 군침을 삼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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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채소지만 먹어보고 사는 큰시누이.
▲ 라오스 새벽시장 처음 보는 채소지만 먹어보고 사는 큰시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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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십 년 전 일은 생생한데 며칠 전 일은 잘 생각나지 않는 내 노화를 실감했다. 어릴 때 우리 동네는, 먼지가 폴폴 이는 신작로 위로 버스가 하루 3번 다니는 곳. 중고생이나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한 남자애, 삼베옷 입은 할아버지나 논두렁에서 뱀에 물려 얼굴이 퉁퉁 부은 아저씨가 타는 게 버스였다. 발 있는 사람들은 걸어 다녔다.

2시간 걸어가면 오일장이 서는 면소재지. 1980년대 초, 서른을 갓 넘긴 우리 엄마는 삼양라면 상자에 '메리'가 낳은 강아지 다섯 마리를 이고 장에 갔다. 첫눈이 온 뒤라 점점 추워질 일만 남은 겨울날, 엄마는 온종일 기다려서 한 마리당 2만 원에 강아지를 팔았다. 그 돈으로 자식 넷 모두에게 오바(겨울 점퍼)를 사줬다.

악착 같이 일해서 논밭을 늘리던 때였다. 땅 파서 일해야만 돈이 나오는 산골에서 우리 엄마는 '새끼들'한테 배달 학습지를 시키고, 방학이면 주산학원에 보냈다(학원비 월 2만 원, 차비에 핫도그와 '쭈쭈바'값 하루 200원). 하얀 살다비(스타킹)에 빨간 말표 구두와 샌들을 신겼다. 명절 때가 아니어도 옷을 사 주는 담대한 엄마였다.

시장이 끝난 곳에도 좌판을 펼쳐놓고 장사한다.
▲ 라오스 새벽시장 시장이 끝난 곳에도 좌판을 펼쳐놓고 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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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아버지도 젊은 날 생선 행상에 나선 적이 있다고 한다. 얼음을 재우지 않은 생선은 금방 상하는데  아버지는 생선 사라는 말을 차마 못해서 며칠만에 그만두셨다.
▲ 그 날 새벽에 잡아온 듯한 작은 물고기들 (내) 시아버지도 젊은 날 생선 행상에 나선 적이 있다고 한다. 얼음을 재우지 않은 생선은 금방 상하는데 아버지는 생선 사라는 말을 차마 못해서 며칠만에 그만두셨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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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지붕 있는 곳에 판매대를 놓은 곳과 아무렇게나 좌판을 벌인 곳이 있었다. 농기구부터 그릇과 신발까지 파는 만물상이 두어 곳, 나머지는 영광 법성포 포구나 옛 군산역의 '도깨비시장'처럼 먹을 것을 주로 팔았다. 상인의 연령대도, 우리 꽃차남처럼 아기 티가 남아있는 어린애부터 얼굴만으로도 세상만사를 보여주는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그날 새벽에 잡은 것으로 보이는, 아주 작은 물고기도 있었다. 맨 바닥에 눕혀진 생선을 보자마자 시간은 바로 거꾸로 돌아갔다. 젊었던 내 (시)아버지도 '투잡'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농부와 생선 행상.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 어물전으로 나가 생선을 샀다. 생선에 얼음을 재우는 행위는 사치스러운 때였다.

한여름, 해가 높아지기 전에 팔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 아버지는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생선 사세요"만 하면 마수를 할 것 같은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집에다 생선을 주고 막걸리를 마셨다. 술기운이 올라도 생선 사라는 말은 안 터졌다. 해 떨어지고, 아버지는 상한 생선과 함께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투잡은 며칠 못 가 끝났다.

환하게 웃으면서도 부끄러움이 많던 할머니한테 나는 약쑥을 샀다.
▲ 라오스 새벽시장 환하게 웃으면서도 부끄러움이 많던 할머니한테 나는 약쑥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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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이 카메라를 들고 오자 할머니는 탁자 밑으로 숨어버렸다. 나도 할머니 따라 앉아서 손을 잡았다.
▲ 라오스 새벽시장 우리 남편이 카메라를 들고 오자 할머니는 탁자 밑으로 숨어버렸다. 나도 할머니 따라 앉아서 손을 잡았다.
ⓒ AT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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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시장은 떠들썩하지 않았다. 장사하는 분들은 눈이 마주치면 수줍게 웃었다. 덩달아 부끄러워져서 눈을 내리깔았다. 물건 놓는 판매대는 제각각이었다. 판자 그대로 있는가 하면, 꽃무늬 장판 위에 물건을 모셔놓기도 했다. 나는 '푸대' 위에다 채소를 놓고 파는 할머니한테 약쑥을 샀다. 카메라를 든 우리 남편이 오니까 할머니는 탁자 밑으로 숨었다.

"할머니가 건강해서 새벽에 장사 나오신 게 훌륭해요"라는 말을 모르니까, 할머니처럼 판매대 밑으로 들어가서 손을 잡았다. 우리 엄마 조팔뚝 여사도 새벽부터 굴비를 엮는다. 쪼그려 앉아 일해도 당신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관광객들이 엄마 일터까지 들어와 막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했다. 그 중에는 굴비를 '한나'라도 사는 사람이 있어서 힘이 난다고.

우리 식구는 몇 가지를 샀다. 고추 꽃처럼 앙증맞은 것은 향이 진했다. 먹어보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 내 얼굴이 찌그러지니까 그걸 판 아이들이 웃었다. 꽈리처럼 생겼으면서 종이 같은 껍질을 까면 단단한 열매인 것도 샀다. 왜 그런지, 향신료로 쓰임직한 것에 시선이 갔다. 양배추나 애호박, 고추처럼 눈에 익은 것들은 지나쳤다.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아기를 좋아하는 서연이 먼저 가서 인사했다. 그이들은 환하게 웃어주었다.
▲ 라오스 새벽시장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아기를 좋아하는 서연이 먼저 가서 인사했다. 그이들은 환하게 웃어주었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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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끼리 손잡게 하는 것, 서로 보고 웃는 것,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 라오스 새벽시장 애들끼리 손잡게 하는 것, 서로 보고 웃는 것,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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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먼 옛날, 설 명절이 지난 어느 2월. 나는 살얼음이 낀 냇가에서 동생 지현의 인형 옷을 빨고 있었다. 그 옷은 주산학원 다닐 때 버스 안 타고 왕복 4시간을 걸어서 모은 돈으로 샀다. 성묘 온 서울 사람들(얼굴이 희면 그렇게 불렀다)이 나보고 불쌍하다며 돈 100원(작은 공책 한 권에 20원)을 내밀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괜찮해라우"라고 했다.

서울 사람은 벌겋게 언 내 손에 끝내 돈을 쥐어주었다. 기분이 좋지 않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안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예의는 있었다. 나는 아무도 동전을 못 줍게 덤불 속에 던져버렸다. 겨우내 묵은 때가 낀 인형 옷을 빤 건 그냥 한 거였다. 볼이 터서 가렵고 아파도, 땅을 뚫고 올라온 달래를 캐러 다니는 게 신나는 것처럼.  

시장에서 나온 우리는 차를 타고 흙길을 달렸다. 뿌옇게 먼지가 일어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길을 갔다. 위화감 없이, 마을 속에 학교처럼 있는 교도소를 지날 때는 남편(대학 다닐 때 학생 운동하다가 감옥살이 했음)한테 옛날 생각 나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났다. 라오스 시장 사람들처럼, 환하게 웃으면서도 부끄러움을 타던, 그 옛날의 내 얼굴이. 

나도 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도 가고 심부름도 다녔다. 환하게 웃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그 옛날의 우리 얼굴들이 생각났다.
▲ 라오스 나도 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도 가고 심부름도 다녔다. 환하게 웃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그 옛날의 우리 얼굴들이 생각났다.
ⓒ 우리집 남성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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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2월 26일부터 3월 3일까지 다녀왔습니다.



태그:#라오스, #라오스 새벽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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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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