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어느 봄, 강의실
(오전부터 한 학생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선생이 학생을 몇 차례 깨우다가 화를 내기 시작한다.)
"○○○ 군, 어제 술 마셨나?"
"새벽 늦게까지 아르바이트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머쓱해진 선생은 다시 교탁 앞에 서지만 이내 옛 생각으로 빠져든다.)
S#2. 그해 봄, 16호실
그해 서울에서 보낸 봄 참 팍팍했다. 형광등을 켜지 않으면 칠흑 같은 어둠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내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세상을 향해 나있는 유일한 통로는 얇은 나무문짝이었다. 그 문을 연다고 해서 세상으로 곧바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방문이 빼곡하게 마주서있는 좁다란 복도를 지나 다시 현관문을 열고, 다시 거기에서 두 개 층을 내려와야만 비로소 햇볕을 쬘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광고로 접했을 때만해도 그 집(?)은 정말 완벽한 곳이었다. 광고에 따르면 그곳은 호텔식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 회선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했고, 비록 공용이나마 깨끗한 욕실이 세 개나 있다고 했다. 하루 종일 따뜻한 밥을 역시 무료로 제공한다고 했다. 나는 그곳을 '집'이라 불렀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곳을 '고시원'이라 불렀다. 물론 거기에서 사는 이들 중 고시를 준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물여섯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 신입생이 된 나에게 고시원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곳은 집에서 조달받는 생활비를 최소로 줄일 수 있게 해주면서도 사생활을 적당히 보호해주는 공간이었다. 첫 인상이 비록 '벌집'에 가까웠고 방에 창문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총무'로 불리던 고시원 관리인은 곧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겨주겠노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고시원에서 보낸 봄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순조롭게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개강이 닥쳐오자 처음 광고를 통해 접했던 고시원의 장점들은 재앙처럼, 아니 정말 재앙이 되어 닥쳐왔다. 등교 시간이 가까워오면 붐비기 시작하는 공용 욕실에서 마음 편히 샤워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루 종일 따뜻한 밥이 제공되었지만 그것은 '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외로움'이었다.
S#3. 봄의 끝, 아니 누군가의 봄
고시원에서 넉 달 정도를 지냈을 무렵이었다. 어느 고시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야반도주하듯 고시원을 떠났다. 고시원에 처음 들어갈 때 박스 하나였던 이삿짐이 박스 두 개로 늘어나 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학 동기와 그 박스를 하나씩 나눠 들고 새로 구한 원룸으로 향했다. 원룸의 베란다는 고시원 방의 두 배 크기였다. 방이 아니고 베란다가 말이다. 오랜만에, 한편으로는 허탈하게 웃어보았다.
그 후로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늦깎이 신입생이었던 나는 당시 내 동기 또래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선생이 되었다.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을 혼내다가 '아르바이트'라는 말 한 마디에 머쓱해하는 그 선생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직은 고시원에서 보낸 그 해 봄을 추억의 소재로 소비할 겨를이 없다. 다만 십여 년 전의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봄이 그해 내가 고시원 16호실에서 보냈던 봄보다는 덜 외롭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동대문구소식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