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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펠강과 봉베르디에 차량기지

2차선 도로를 따라 로타리를 거쳐서 걸어가면 드넓은 강이 보인다. 물론 이곳이 한강만큼 넓지는 않지만 강변에는 요트들이 즐비해 있었다. 또한 여기서 바지선도 볼 수 있었는데 폴란드로 어떤 물자를 수송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 강의 이름은 하펠 강(Der Havel). 엘베강의 지류이며 베를린 서쪽에 거대한 호수를 구성해주기도 한다. 또한 하펠강 좌우로는 자전거길이 있어서 이 강을 자전거로 따라가면 포츠담으로 향한다. 포츠담에서 더 나아가면 엘베강에 이르며 엘베 강에서도 역시 강변 자전거 길을 통해 함부르크나 프라하까지 갈 수 있다. 오늘날 자전거로 쉽게 강변을 여행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벽시대에는 강의 일부 구간의 경우 강변 바로 옆에 장벽이 놓였었고 이 장벽의 흔적은 현재 서베를린 슈판다우(Spandau) 지역인 하켄펠데(Hakenfelde)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주로 요트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끔 폴란드로 가는 바지선이 지날 때도 있다.
▲ 헤닝스도르프 하펠강의 광경 평상시에는 주로 요트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끔 폴란드로 가는 바지선이 지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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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며, 고니도 또한 볼 수 있다.
▲ 하펠강의 오리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며, 고니도 또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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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기존 숲길과는 달리 서쪽으로 강을 즐기면서 산책을 할 수 있다. 강변 산책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독일 열차 차고지를 볼 수 있는데, 이 차고지는 독일의 차세대 열차 모델을 개발하는 곳이다.

독일에 처음 온 2010년에 중국에서 온 첸첸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녀도 현재까지 봉바르디에(Bombardier) 차이나에서 일하고 있는데 헤닝스도르프 기지에서 파견근무 중이었다. 그녀는 독일에서 매년 열리는 철도박람회인 이노트란스(Innotrans)를 준비하면서 한국의 현대로템이 자신의 회사의 라이벌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필자가 장벽길을 유람했을 때 첸첸은 독일 서부지역으로 부서이동을 했지만, 그녀가 이곳에서 일해서 그랬는지 무심코 지나갈 뻔한 곳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생산된 차량은 헤닝스도르프역의 철도와 연결되어 공급된다. 장벽 오른편에 있다.
▲ 봉바르디에 차량기지 이곳에서 생산된 차량은 헤닝스도르프역의 철도와 연결되어 공급된다. 장벽 오른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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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바르디에는 사실 캐나다 퀘백주에 있는 회사인데 철도차량뿐만 아니라 소형 항공기 디자인과 캐나다 군대를 위한 군산업체로도 유명하다. 철도의 국가 독일답게 봉바르디에 헤닝스도르프는 베를린 전차, 지하철차량 그리고 ICE고속열차 등을 생산 및 공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봉바르디에의 철도사업부분의 본부는 현재 베를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상하이, 선전 그리고 광저우 지하철 차량의 개발공급업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첸첸이 여기에 와서 파견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장벽길 바로 오른쪽 옆을 보면 가끔 생산된 열차가 시험운전을 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이 철로에서 생산된 열차를 시험운전한다. 장벽길 바로 옆에 놓여 있다.
▲ 장벽길 옆으로 놓여진 선로 이 철로에서 생산된 열차를 시험운전한다. 장벽길 바로 옆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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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차량기지도 냉전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차량기지는 우리에게 전자제품 회사로 유명한 AEG가 1913년부터 철도차량생산 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5년 소련의 점령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이곳은 점령군에게 몰수당했으며, 1947년 동독의 VEB(Volkseigener Betrieb, 직역하면 인민소유회사)가 이곳을 운영하여 동독 지하철과 철도차량을 공급하는 기지로 활용되었다.

통일 이후 1992년 VEB가 해체가 되자 80여 년 전의 이곳에 주인이었던 AEG가 다시 이곳을 인수해서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후에 ABB와 다임러-벤츠 철도 차량 사업부분을 합병한 Adtranz가 1996년 인수하게 되고, 2001년에는 봉바르디에가 이를 인수함으로써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지금은 100년 전 주인과는 다른 회사가 운영하지만, 이곳의 원래 주인이었던 AEG가 45여 년 만에 이곳을 다시 인수했을 때에 당시 CEO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펠강 수문통제소

햇빛이 비치는 강변을 계속 따라가면 흥미로운 역사자료를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동독이 하펠강을 장벽처럼 통제했는가에 대한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역사자료를 전시한 푯대 앞에는 길쭉한 섬을 볼 수 있다. 이 섬을 기준으로 위쪽은 니더 노이엔도르프 호수(Nieder-Neuendorfer See) 아래의 강은 북쪽으로 연결되는 하펠강이다. 푯대에서 장벽길 남쪽방향으로 보면 또 하나의 강이 보이는데, 사실 이것은 강이 아니고 하펠운하이다.

이 섬이 동독의 운하통제를 용이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길쭉한 섬 이 섬이 동독의 운하통제를 용이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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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펠운하에서 어떻게 동독이 해상수송을 관리했는지 답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니더 노이엔도르프의 하펠강은 내가 서 있는 노이엔도르프 호수를 거쳐 테겔호수를 만난 다음 슈판다우를 거쳐 베를린 남서쪽의 반 호수(Wannsee)로 연결된 다음 포츠담으로 향한다.

18세기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해상수송은 독일의 산업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하펠강의 경우에는 당시 프로이센이 지배한 폴란드에 물자를 수송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수로이기도 하였다.

하펠강을 지나면 하펠-오데르 운하를 거쳐 현재 독일-폴란드 국경인 오데르강을 통해 폴란드 남부 지역에 이를 수 있었다. 현재는 고속도로의 발달과 EU역내무역의 발달로 인해 해상수송이 18세기 산업시대보다는 드물지만, 가끔 이 강을 통과하여 폴란드로 향하는 바지선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바지선을 대신하여 요트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탈바꿈하였다.

하펠운하는 1952년에 완공되었고, 기존 선박은 이 곳으로 우회하여 항행하였다. 장벽 건립시에는 이 사진에서 오른쪽편으로 수문통제소가 세워졌다.
▲ 하펠운하에서 바라본 길쭉한 섬 하펠운하는 1952년에 완공되었고, 기존 선박은 이 곳으로 우회하여 항행하였다. 장벽 건립시에는 이 사진에서 오른쪽편으로 수문통제소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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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1951년 정부는 기존의 하펠강을 우회하는 하펠운하(니더 노이엔도르프-포츠담 구간)를 착공하여 1953년 완공하게 된다. 현재도 이 운하의 흔적은 남아있지만 냉전시대처럼 배가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긴 힘들다.

이 운하를 착공하고 1960년대 베를린 장벽을 계획하며 마련한 방안이 바로 위의 있는 길쭉한 섬과 내가 서 있는 곳의 남쪽의 육지를 이용하여 기존 하펠강의 뱃길을 끊어버리는 수문통제소를 세우게 된다. 수문통제소 옆에 섬과 육지에는 감시탑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이들은 수영을 통한 탈출을 막기 위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수문통제소를 이 사진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수문통제소 주위에는 감시탑이 삼엄하게 놓여있었고, 당시 소련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 당시 수문통제소의 모습 당시 수문통제소를 이 사진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수문통제소 주위에는 감시탑이 삼엄하게 놓여있었고, 당시 소련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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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가 바로 당시 수문통제소와 하펠운하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붉은 선은 기존 장벽, 노란 선은 장벽길, 강 중심의 빨간 점선은 행정분할선이다. 하펠운하는 이 사진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이며, 하펠운하 남쪽의 육지와 길쭉한 섬 사이에 수문통제소가 있었다. 이 사진을 확대하면 길쭉한 섬이 기존 위의 큰 섬과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붙어 있었다.
▲ 장벽시대의 하펠강 이 지도가 바로 당시 수문통제소와 하펠운하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붉은 선은 기존 장벽, 노란 선은 장벽길, 강 중심의 빨간 점선은 행정분할선이다. 하펠운하는 이 사진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이며, 하펠운하 남쪽의 육지와 길쭉한 섬 사이에 수문통제소가 있었다. 이 사진을 확대하면 길쭉한 섬이 기존 위의 큰 섬과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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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펠강의 희생자들

이렇게 삼엄한 감시에도 탈출을 시도하려는 두 청년이 있었다. 첫 번째로 소개할 희생자는 동독에서 살던 18세 소년인 페테르 크라이틀로프(Peter Kreitlow)였다. 페테르는 당시 댄스강좌에 같이 참석하고 있던 3명의 친구와 함께 1월에 언 강변을 이용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고 했다.

당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 군인이 이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해 머리와 다른 신체부위에 수많은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 사건은 동독시민들에게 소련 주둔군에 대한 엄청난 반감을 일으켰는데 마치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반응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탈출 시도자는 특이하게도 동독 사람이 아닌 폴란드 사람이었다. 이름은 프란치스체크 피시크(Pranciszek Piesik). 사망 당시 25세 청년으로 그의 직업은 내륙항해사였고 하펠강을 자주 드나들곤 하였다. 자신의 직업경험을 바탕으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기 위해 그는 당시 내가 서 있는 지역을 스케치한 후 1967년 10월에 고무보트를 타고 폴란드 국경을 몰래 통과한 다음 헤닝스도르프에서 모터보트를 훔친 후 앞에 있는 길쭉한 섬으로 향했다.

길쭉한 섬 반대쪽인 서베를린 지역의 니더 노이엔도르프 호수에서 모든 장비를 다 내려놓고 수영을 하여 탈출을 시도하지만 안타깝게도 11일 후 여기서 남쪽으로 더 떨어진 테겔호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만다.

이 두 희생자의 사건경위를 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목숨을 걸고 건넌 북한이탈주민들이 생각났다. 이곳과는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겨울강변을 북한군인과 중국공안 몰래 건널 때 그들의 심정은 마치 장벽을 탈출할 때의 페테르와 프란치스체크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강변을 탈출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국대륙에서 몇 천 킬로미터를 공안 몰래 거친 다음 우리나라로 온 이들이다. 현재 이렇게 해서 탈출한 북한이탈주민은 현재 2만여명. 우리는 이들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줄 필요가 있다.


태그:#베를린장벽길, #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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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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