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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의 절집은 왜 이리도 쓸쓸한 겨?

 진각국사비
진각국사비 ⓒ 이상기

마애불두를 보고 등산로로 나오니 다들 지쳤다. 그곳에서 또 다시 30분을 걸어 내려가니 아침에 출발한 경포대 주차장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월출산 천황봉을 중심으로 동남쪽 사면을 한 바퀴 돈 셈이다. 도상거리로는 6~7㎞ 정도지만, 암릉과 수풀을 지나가는 길이어서 육체적인 부담은 상당한 큰 편이었다. 나는 경포대에서 오늘 지나온 궤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경포대 산장 주변에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러고 보니 매화철이다. 올해는 날씨가 추워 꽃이 늦은 편이다. 나는 이제 월남사지로 간다. 가는 길에 잠깐 진각국사비를 보고 간다. 진각국사비 앞에는 뚝뚝 떨어진 빨간 동백꽃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주변 담장에는 매화도 한창이다.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그는 수선사(현재: 송광사) 출신의 16국사 중 한 명으로,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수선사 2세 사주가 되었다.

 훼손된 진각국사비
훼손된 진각국사비 ⓒ 이상기

진각국사비는 현재 귀부만 온전하고, 탑신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이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문의 내용은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잘 남아 있다. 비문에 따르면 진각국사는 단속사 주지와 수선사주를 지냈다. 전라도 화순 사람으로 이름은 혜심이고 법호는 무의자(無衣子)다. 1202년 조계산 수선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을 은사로 출가했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2세 사주가 되었으며, <선문염송> 등 많은 책을 남겼다. 1234년 6월 26일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56세, 법랍 32세였다고 한다.

이에 고종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했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그리고 진각국사비는 1235년 월출산 월남사(月南寺)에 세워졌다. 비문은 문하시랑 평장사 한림원사 이규보가 짓고, 음기(陰記)는 상서 한림학사 최자가 지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었다. 이규보의 비문 중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쓸쓸한 월남사지
쓸쓸한 월남사지 ⓒ 이상기

"국사는 천성이 온화하고 충실하였다. 이미 유(儒)에서 석(釋)으로 갔으므로 모든 내외(內外)의 경서(經書)를 널리 통달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승(佛乘)을 담양(談揚)할 때나 게송(偈頌)을 찬저(撰著)할 때에 이르러서는 마치 능숙한 재인(宰人)이 여유만만하게 칼을 놀리듯 자유자재하였다. 이와 같지 않고서야 어떻게 능히 서울 땅을 밟지도 않고서 앉아서 온 나라의 숭앙(崇仰)함을 누림이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 참으로 선문(禪門)의 정안(正眼)이며 육신(肉身)의 보살이라고 할 만하도다."

나는 비석을 보고 월남사지 절집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절집이 말 그대로 빈 절간처럼 퇴락해 있다. 사실 빈 절간이 되고 말았다. 삼사 년 전만해도 종명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도 떠난 것 같다. 그나마 담벼락 앞 꽃밭의 수선화가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리고 있다. 나는 절집을 한 바퀴 돈다. 탑과 건축 부재는 그대로 있고, 서쪽 밭 부분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월남사지 3층석탑
월남사지 3층석탑 ⓒ 이상기

우리 답사팀원들은 이제 3층 석탑에 모여 탑에 대해 한판 토론을 벌인다. 이 탑은 순수 백제계 탑이면서도, 모전석탑의 양식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모전석탑 양식이라는 주장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미륵사지, 정림사지, 왕궁리 5층석탑과 같은 백제계 전형양식을 계승한 순수 백제계 양식의 석탑으로 분류하고 있다.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탑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3층석탑이 있어 월남사지는 그나마 절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극락보전의 보물은 잊을 수 없어

 선각대사 편광탑비
선각대사 편광탑비 ⓒ 이상기

월남사를 보고난 우리는 차를 타고 무위사로 이동한다. 무위사는 강진을 대표하는 절집이다. 역사도 그렇고, 문화재도 그렇고, 이곳 출신의 스님들도 그렇다. 무위사 사적에 따르면 절이 신라 헌강왕 1년 875년 도선국사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905년 가지산문 계열의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가 주석하면서 절이 크게 중창되고 사세를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절에 있는 '선각대사 편광탑비'를 통해 알 수 있다.

형미스님은 무주(武州) 출신으로, 장흥 보림사로 가 보조선사 체징(體澄)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았다. 천우 2년(905년) 6월 무주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회진이 지금의 강진이다. 그는 무위갑사의 주지가 되어 8년간 주석하였다. 이때 찾아오는 사람은 구름 같았고, 모인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그러나 왕건과 함께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간 대사는 왕건의 편에 서다가 917년 궁예로부터 죽음을 당했다. 이때 나이는 54세고 법랍은 35세였다고 한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 극락보전 ⓒ 이상기

현재 무위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문화유산은 극락보전과 그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 삼존벽화와 좌상, 백의관음도다. 이들은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어 고려 후기 건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둥은 주심포식으로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아미타 삼존불도 극락전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여래 삼존벽화는 1476년(성종 7)에 조성되었다. 이는 '무위사 극락보전 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을 통해 확인된다. 삼존벽화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을 2구씩 그려 넣었다. 색채와 신체 표현에서는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인물의 크기나 간결한 무늬 등에서 조산 초기의 새로운 양식도 보여준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 이상기

그러나 무위사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신비하게 생각하는 문화유산은 아미타 삼존벽화의 뒷면에 있는 백의관음도다. 하얀 옷을 걸친 관음보살이 연잎을 타고 일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나가고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어 예를 표하는 비구(比丘)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비구의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그려져 있다. 퇴색되어 확인이 쉽지 않지만 파랑새다. 비구승과 파랑새 이야기를 도갑사 이영현 종무실장이 해 준다. 그는 도갑사로 가기 전 이곳 무위사 종무실장을 지냈기 때문에 무위사의 문화유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 그 덕분에 우리는 무위사와 도갑사에서 문화유산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었다.

 아미타 삼존벽화
아미타 삼존벽화 ⓒ 이상기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한 노승이 극락전 벽화를 그리겠다고 찾아왔다. 그는 후불벽화 작업에 들어갔고, 100일 동안 법당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그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한 젊은 승려가 창문 사이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놀란 파랑새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 때문에 후불 삼존벽화 왼쪽에 있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와 관음보살의 눈을 확인해 보니 정말 눈동자가 없다. 백의관음도의 왼쪽에는 또 5언율시가 적혀 있다. 그 내용이 관음보살과 관련이 있고, 파랑새 전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바닷가 외딴 곳                                         海岸孤絶處
한 가운데 낙가봉 있어                               中有洛迦峰
대성 관음이 머문듯하나 머물지 않고            大聖住不住
그의 보문행을 만난듯하나 만나지 못했네.     普門逢不逢
훌륭한 사람 되려는 욕심도 없고                  明珠非我欲
여기서 그대가 만난 건 파랑새뿐                  靑鳥是人逢
원컨대 푸른 파도 위에                               但願蒼波上
친히 보름달의 모습을 더 하고 싶네.             親添滿月容

무위사 절집의 변화

 해탈문부터 보제루까지 새로 조성된 공간
해탈문부터 보제루까지 새로 조성된 공간 ⓒ 이상기

무위사 절집은 최근에 많이 변했다. 우선 입구에 예전에는 없던 해탈문이 생겼다. 월출산 무위사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그렇게 잘 쓴 글씨는 아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무위다원이 있다. 이곳을 지나 앞으로 가면 4천왕문이 있다. 4천왕문을 지나면 2층 누각인 보제루(普濟樓)가 있다. 보제루까지의 공간이 예전에는 없던 것이다.

이 보제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야 법당 마당에 이르게 된다. 넓은 마당 앞으로 극락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무위사의 본전은 누가 뭐래도 극락전이다. 극락전 앞에는 연화문 배례석이 있다. 그런 걸 보면 극락보전 앞에 탑이 있었을 텐데, 3층 석탑이 마당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극락보전과 선각대사 편광탑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여러 번 자리를 옮긴 것 같다.  

성보박물관에 있는 불화 이야기

 삼존불화
삼존불화 ⓒ 이상기

나는 극락보전을 보고 나서 성보박물관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보살도, 주악비천도 등 극락전 안쪽 사면에 있던 벽화가 전시되어 있다. 모두 29점인데, 이를 분류하면 삼존불화 1점, 아미타래영도 1점,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이다.

삼존불화는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한 가운데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과 여섯 비구를 배치하였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으며,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이들은 조선 초기 불화로 그 가치가 높다.

 주악비천도
주악비천도 ⓒ 이상기

오불도는 5명의 부처를 그린 그림이다. 보살도 5점도 특이한데, 다른 그림에 비해 선명하다. 그것은 아마 후대에 채색이 더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료에 의하면 벽면을 보수하면서 1차 벽화 위에 2차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2차 벽화는 붉은색과 녹색을 위주로 그린 조선 후기의 것이다.

그림의 생동감에 있어서는 주악비천도가 최고다. 천녀가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연화 당초문 향로도는 향로를 중심으로 연꽃과 당초문이 그려져 있다. 보상 모란문도에는 모란이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당초문만 그린 그림도 있다. 연화문, 당초문, 모란문 그림에서는 종교적인 신비감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친근감이 느껴진다.


#월남사지#무위사 극락전#아마타 삼존벽화#백의관음도 #극락전 내면 사면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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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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