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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로마법 그 핵심에 대하여 잠시 설명해 보자. 로마법은 한 시기의 특정한 법률체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거의 1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로마인들의 법체계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법의 기원은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법률이 <12표법>(기원 전 450년)이다.

이 법률은 귀족층의 자의적인 법 집행을 막기 위해 평민들이 요구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의 관습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성문법화 한 것인데, 로마의 대표단이 그리스를 현지 답사하여 그리스의 개혁 정치가 솔론의 법률 등을 조사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편린만이 전해져 올 뿐이지만 로마 공화정 시기 사법과 공법의 원천으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법률이었다.

<12표법> 상상 일러스트레이션
 <12표법> 상상 일러스트레이션
ⓒ www.every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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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이 로마법이라 하면 그 핵심은 로마제국 시절, 팍스 로마나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제정 시기에 만들어진 법체계를 의미한다. 곧, 1세기 초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3세기 초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까지 발전한 로마의 법체계이다. 로마법은 장구한 세월 동안 발전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법률 해석과는 달리 당대의 유명 법률가들의 의견이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권위 있는 법률가들이 만들어 놓은 주석서, 의견서, 판례집 및 교과서가 법적 문제의 판단기준으로 사용되었다. 로마법에서는 기원 후 2세기에 명성을 얻은 몇 몇 법률가가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길이 남겼는데, 파울루스, 가이우스, 울피아누스 등 3인방이 바로 그들이다. 지금도 서구의 최고법원 앞에 가면 이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법률가들이 바로 이들 로마 법률가들의 후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이다.

독일이 주도한 로마법의 재발견

로마 시내에 있는 이태리 최고법원이다. 이 건물 앞에 있는 조각상들의 주인공이 바로 로마시대의 법학자인 울피아누스 등이다.
 로마 시내에 있는 이태리 최고법원이다. 이 건물 앞에 있는 조각상들의 주인공이 바로 로마시대의 법학자인 울피아누스 등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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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이 후세 특히 중세 이후에 서양의 법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적 원인 중 하나를 꼽는다면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483-565)의 공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역사상 업적이 단순히 황제라 칭하지 않고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황제다. 그 만큼 한 일이 많다. 그는 로마가 동서로 나뉘어 있을 때 동로마의 황제였지만 일찍이 내란을 극복하고 절대 황제가 된다. 재위시기에 과거 로마제국의 지경 대부분을 회복하고 내정에도 일대 혁신을 꾀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태리 산 비탈레 성당의 유스티니아누스 초상 모자이크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태리 산 비탈레 성당의 유스티니아누스 초상 모자이크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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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스탄불에 가면 위대한 건축물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야소피아', 소위 성소피아 성당으로 불리는 국립박물관이다. 바로 유스티니아누스가 만든 성당(537)으로 자그마치 1500년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유스티니아누스와 아야소피아에 대해서는 후일 따로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그의 공적 중 제일은 재위 시절 <로마법대전>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로마법하면 바로 이 <로마법대전(Corpus Juris Civils)>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로마법대전>은 유스티니아누스가 당시 사법장관이었던 트리보니아누스에게 명하여 만든 로마의 법률체계 전체를 말한다. <로마법대전>은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법학 초학도를 위한 교과서 <법학제요>(Institutiones), 제2부는 울피아누스 등의 고전기(2세기) 학자들의 저술을 사항 별로 모아 만든 <학설휘찬>(Digesta, 그리스어로는 Pandectae),  제3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의 황제의 칙법(결정)을 모아 놓은 <칙법휘찬>(Codex), 제4부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법 모음인 <신칙법>(Novellae)이다.

로마법대전 중 학설휘찬, 16세기 판의 첫 표지이다.
 로마법대전 중 학설휘찬, 16세기 판의 첫 표지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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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학설휘찬>인데, 이것은 법원칙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된다. 후대의 법률가들은 어려운 법률문제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이 책을 찾아본다. 그러면 로마의 위대한 법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했는지가 나온다. 그러면 후대의 법률가는 자연스럽게 그것에 근거하여 법적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식으로 로마법은 후대의 법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법이 세계의 법률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중세 이후의 로마법의 재발견, 이를 이은로마법의 계수(繼受)에 있다. 로마법의 재발견은 주로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린 독일이 주도하였는데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독일은 13세기 이후 중앙 권력인 황제의 권력이 점점 약화된 반면 7명의 지방 선제후가 점차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이런 연유로 지역의 법이 국가(중앙)의 법에 우선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등 법적 안정성이 매우 훼손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근대 유럽의 법질서에 영향력을 발휘한 로마법

한편, 독일 황제는 신성로마황제로서 과거 로마황제의 후예라는 인식이 강했다. 따라서 독일제국 내에서는 로마법이 (신성로마)황제의 법이라고 간주하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독일제국 내의 모든 법원에서 로마법을 적용해야 하고, 법률가들은 로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으로 연결되었다.

로마법이 독일제국 내에서 본격적으로 통일법 운동으로 연결된 것은 18세기 이후 역사법학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독일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역사주의가 성행했는데 이것은 법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역사 속에서 생성, 소멸한다는 것으로 역사 외적인 이성이나 자연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성격을 달리하는 학문운동이었다.

따라서 사비니(1779-1861)와 같은 법학자에 의하여 주도된 역사법학에서는 독일 민족의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고유의 법을 찾는 것이 법학자의 주요한 과제였다. 여기에서 로마법이 재발견된다. 로마법이 독일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고유의 법이라는 것이다. 로마법을 공부하고, 이를 현실에서 적용해야 하는 당위성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로마법은 역사법학자 외의 영역에서도 환영 받을 소지가 많았다. 왜냐하면 로마법의 보편성 때문이다. 로마법은 속성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을 지향했기 때문에 합리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통일법 운동에서도 역사적 법원(法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중세 이후 유럽의 그 어지러운 정치질서를 극복하고 각 국가가 통일 민족국가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로마법은 인간이성의 주요한 증거로서 자연스레 중요시 될 소지가 컸다.

이런 이유로 로마법은 근대 유럽의 법질서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19세기 서구 법제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불리는 나폴레옹 민법전(1804)은 그 제정과정에서 로마법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민법전을 만든 사람들은 이 법전을 만듦에 있어 가장 많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로마인들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혔다. 그리고 많은 주석가들이 프랑스 민법의 각 조문의 그 역사적 연원을 로마법에서 찾았다.

나폴레옹 법전으로 알려진 1804년 프랑스 민법의 첫 페이지,
 나폴레옹 법전으로 알려진 1804년 프랑스 민법의 첫 페이지,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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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뒤 늦게 통일법 운동에 뛰어 든다. 프로이센이 독일 전역을 통일하여 통일 제국을 만든 19세기 후반 독일 민법을 만들게 되는데 이때도 위에서 본 사비니 등의 역사법학의 영향은 거셌다. 따라서 1900년에 발효된 독일 통일 민법도 로마법의 강력한 영향권 내에서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로마법→독일법 혹은 프랑스법→일본법→한국법

이토 히로부미, 우리에겐 식민통치의 원흉으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망하였으나 일본에선 근대화의 아버지로 통한다
 이토 히로부미, 우리에겐 식민통치의 원흉으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망하였으나 일본에선 근대화의 아버지로 통한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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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민법과 독일 민법은 대륙법계(이것은 영미의 보통법계에 대응한 시민법(civil law)계를 뜻함) 국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근대화 과정에 있었던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프랑스 민법이나 독일 민법의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어땠는가. 이들 법률은 일본의 서구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유입한다.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문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법률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한 사회의 질서를 법률로 통제하지 못하면 어떤 물질문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수많은 인재를 서구로 보내 법률을 공부케 한다.

이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토 히로부미(1841-1909)도 끼어 있다. 그는 메이지 정부의 고급관료로서 독일에 가서 독일 헌법을 공부해 와 일본 제국헌법의 기초를 닦고 일본제국 초대 수상이 된 자이다.

대한민국의 법령을 모아 놓은 대법전, 우리나라의 법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법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법령을 모아 놓은 대법전, 우리나라의 법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법에 이른다.
ⓒ 법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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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분야에서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초기에는 프랑스였고, 프랑스 민법이었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독일(프로이센)이 통일 제국을 만든 다음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나타나 독일헌법을 만들고 뒤이어 프랑스 민법을 뛰어 넘는 통일 민법(1896)을 만들어 내자 일본은 법률 수입선으로 독일을 선택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이 만든 민법전(1898)은 독일 민법전을 근간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 한국은 어떤가. 20세기 초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인을 선생으로 해서 일본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법률이 그대로 사용된다. 우리의 법률가들도 일본의 제도 아래 배우고 훈련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법률 및 법학의 뿌리이다.

그러니 우리 법률의 뿌리가 "로마법→독일법 혹은 프랑스법→일본법→한국법"이라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고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법률에는 로마인들의 숨결이 뛰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태그:#로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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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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