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의 가장이 자살로 생명 보험금을 타내, 가난에 찌든 가족들을 살려냈다는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요즘에야 수많은 보험사기 극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치부되곤 하는 이런 레파토리에는, 사실 굉장히 신파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즉, 어느 정도 감동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이 레파토리가 1949년 퓰리쳐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도 쓰인 걸 보면, 그만큼 보편적인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30년대 미국이라... 당시 미국은 1929년 뉴욕 월가로부터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국가 창설 이래 유래 없는 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그나마 내몰리지 않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청산할 길 없는 빛에 허덕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본래 가진 것 없는 소시민들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997년 말에 터진 IMF 위기 때, 가장 부각된 사건은 대기업들의 줄도산이었다. 반면에 소시민들의 파산은 어찌 보면 너무나 일반적이었기에 부각이 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그때의 여파가 15연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우리 가족의 삶에도 그 이전과 이후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2008년에 터진 세계금융위기는 1929년 세계대공황과 가장 유사한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최고의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시기에서 터진 위기라는 것과 그 시발점이 미국 자본주의의 맹아인 월가인 것 등 말이다. 그때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이 위기는 2010년대에도 쭉 이어질 것이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미국은 어떠한 방법이든 강구할 것이다. 그것이 제3차 세계대전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평생을 일해서 집을 얻었는데... 그 속에 사람이 없어각설하고, 어떤 위기가 터지든 제일 피해가 가는 계층은 가진 것 없는 소시민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는 세일즈맨이자 소시민이다. 그래도 그는 한때나마 잘 나갔다. 세계대공황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각종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세계 최고의 국가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세계의 자본가 역할을 하던 시기였다. 넘쳐나던 물자 공급은 그것을 수요자에게 연결해주는 세일즈맨을 필요로 하였고, 이에 세일즈맨은 실력보다 인맥에 기댄 전략으로 전국을 누볐다. 윌리는 그런 시대에 알맞은 세일즈맨이었던 것이다.
윌리 : 생각해 봐. 집을 사려고 평생 일했어. 마침내 내 집이 생겼는데 그 속에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요. 린다 : 여보, 인생은 버리며 사는 거예요. 항상 그런 거지요.(본문 속에서)희곡은 늦은 밤 윌리의 귀가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0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물건을 팔기 위해 전국을 누빈다. 하지만 예전의 명성은 온데간데없다. 그가 자랑하던 인맥을 구성한 사람들은 이제 죽거나 아무런 힘이 없다. 30년이 넘게 충성스럽게 일한 그의 회사에는 그보다도 훨씬 능력 있고 젊은 세일즈맨들이 넘쳐난다. 위기에 직면한 나라와 회사는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잘 나갔던 예전을 떠올리며 현실 도피의 모습을 보인다.
길지 않은 나의 인생에서도 좋았던 때가 있고 힘들었을 때가 있다. 너무나도 힘들었을 때, 혼자 있게 되면 생각나곤 했다. 마냥 저냥 좋았던 어릴 때,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 시절 등이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되고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현실에서 보았을 때, 그때 그 시절은 생각 속에서나마 나의 존재가치를 높여주는 매개체로 작용했던 것이다.
힘들수록 과거로 도피하는 윌리윌리는 현실이 힘들면 힘들수록 과거로 도피한다. 돈벌이는 점점 줄어드는데 구입하고 수리하고 빚을 갚는 데 들어가는 돈은 더욱 늘어나고, 수 십 년에 걸쳐 빛을 값아 내 것이 된 집이건만 회사에서 잘리니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어릴 때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으로 세계를 재패할 것만 같았던 아들은 비렁뱅이 신세가 되어 있다. 그럴수록 그는 어느 정도 부유하고 대접받고 걱정 없던 과거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미국 역사의 한 단면을 그려 보이기까지 한다.
즉,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되기 직전의 시기를 그의 어린 시절에 빗대었고,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로 호령하고 있던 시기를 역시 그의 잘나갔던 시절에 빗대었다. 그리고 미국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당시는 윌리 또한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시대와 국가, 그리고 개인이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그런 설정인 동시에, 만들어진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보편성에 깊은 소회가 들게끔 한다.
윌리 : 오, 형님. 어떻게 하면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빛과 가족애로 가득했고 겨울엔 썰매 타느라 두 볼이 붉어지는 줄도 몰랐죠. 언제나 어떤 즐거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뭔가 좋은 일이 앞에 있었어요. 집 안에서 나는 여행 가방을 들 필요조차 없었고 빨간 자동차는 항상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어떻게 해야 내가 그 애에게 뭔가 남겨 주면서 나를 더 이상 혐오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본문 속에서)베이비부머라고 불리는 1950~60년대 생은 1970~80년대의 호황과 함께 성장했다. 전쟁으로 바닥을 친 국가가 가야 할 길은 오르막뿐이었고, 그에 속한 개인들이 가야할 길 또한 같았다. 1970년대 생은 1997년 IMF에 직격탄을 맞았다. 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들의 인생 또한 상당한 파멸을 면치 못했다. 1980년대 생 또한 또 다른 국가 위기인 2008년 금융 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그들의 운명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옛날을 생각하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복고'가, 한때의 유행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윌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위기가, 어려움이 지속될수록 '복고'의 열풍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더 이상 읽히지 않기를...남들이 보기에 윌리의 상태는 심각했다. 헛것을 보고 환청이 들리는 상황이 정상적이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지 않은가? 극 중, 윌리의 꿈속에 계속해서 나오는 윌리의 형은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알래스카로 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직장에서 평생 동안 일을 한 윌리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옛 일일 것이다.
그에게 후회되는 옛일이 하나 더 있다. 외간 여자와의 외도 장면을 그의 장남 비프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 충격으로 비프의 삶은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물리학적으로는 아버지를 찾아오느라고 수학에서 낙제를 받아 졸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정신적으로는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하던 아버지라는 마음의 기둥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었다.
무너진 윌리의 삶, 무너진 비프의 삶, 무너진 가족의 삶... 이는 시대의, 국가의 붕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 위의 언급을 부정하는 것일까? 윌리 개인의 잘못에서 시작된 붕괴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윌리의 말을 들어보자.
윌리 : 그 여잔 아무것도 아니야. 난 외로웠어. 너무 외로웠을 뿐이야.(본문 속에서)윌리가 외로웠던 건 전적으로 그의 잘못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인 것이다. 운명공동체로 묶여진 시대, 국가, 개인의 삶이 서글프다.
윌리는 결국 허상 속의 형의 손짓을 따라 죽음의 길을 간다. 죽는 순간까지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은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지만, 안타까움을 금할 길은 없다. 그의 비극(비극이라고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으로 살아있는 가족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고, 이런 비극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짧은 비극이 시공을 초월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위기가, 어려움이 찾아올수록 이 작품은 더욱더 사랑을 받을 것이다. 작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작품이 더 이상 사랑받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린다 :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본문 속에서) 덧붙이는 글 |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민음사 펴냄, 2009년(194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