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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사내를 이르던 말.

'머슴'에 대한 포털 다음 국어사전 뜻풀이다. 어릴 적 동네에도 머슴들이 있었다. 그들 삶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참 힘들겠다,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머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1997년 IMF '방아쇠'를 당긴 한보그룹 몰락 때 청문회에 나왔던 정태수 당시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머슴이 뭘 알겠는가."

'머슴론' 존재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이 한 마디는 대한민국 재벌그룹 회장들이 임직원들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말이었다. 월급쟁이들은 "머슴이 뭘 알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자본이 노동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느낌마저 든다. 적어도 머슴은 지주에게 모든 생존권을 박탈당하진 않았다. 다른 지주와 부농에게로 옮길 수 있고, 자작농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노동자들은 강하게 표현하면 '파리목숨'이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일류기업이 된 국내 한 대기업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된다"는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 결성을 방해한다. 헌법조차 무시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자본의 눈치를 보고, 공권력은 감시한 자본을 잡아넣기보다는 노동자를 옭아맨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OO공화국', 'OO제국'같은 민주시민에게는 부끄러운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과연 '대한민국은 조선시대보다 너 낫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선 노비들>
<조선 노비들> ⓒ 역사의 아침
여기 책 한 권이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쓰고 있는 김종성 시민기자가 쓴 <조선 노비들-천하지만 특별한>(역사의 아침 펴냄)이다.

선비와 토론한 노비, 박인수

<조선노비들>은 그동안 사극을 통해서 보고 느꼈던 '노비'에 대한 짧은 생각을 고쳐주고, 더 풍성하게 해준다.

조선시대 노비 열여덟 명의 삶을 소개하고, 각각의 노비와 관련된 개별 쟁점, 즉 노비의 개념, 기원, 결혼, 직업, 사회적 지위, 유형, 의무, 법률관계, 재산, 자녀, 면천, 저항 등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또한 사료 속에만 존재하던 인물들을 사료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동안 사극이나 문학 작품 등에서 '하나의 면'만이 부각된 노비들의 본모습과 함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조선을 지탱했던 기둥 중 하나였던 '노비제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 출판사 소개

SBS 드라마 <뿌리깊은나무>(2011)에서 똘복(강채윤 어릴적 이름)과 석삼(똘복이 아버지)이 글자를 알았다면, 석삼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똘복과 석삼이처럼 조선시대 노비들은 문자를 해독하지 못했다. 세종 이도의 한글창제도 문자 해독을 못하는 백성 때문이었다. 당연히 노비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노비가 있다. 서경덕의 제자로 당대 최고 학자인 박지화에게 유학을 배운 노비 박인수다. 박인수는 불경까지 익혀 선비들과 토론을 해도 막힘이 없었다. 한 마디로 '알아줄' 정도였다. 그런 그를 그 시대 선비들은 노비가 글자를 안 다고 내치지 않았다. 그를 존경했다. 그렇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조선 선비들은 자신보다 학식이 높은 자를 존경할 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이 조선이 527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면서 "박인수를 떠받는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적었다. 나 역시 납득하기 힘들다. 우리가 가진 노비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좁기 때문이리라.

여종 손가락 자른 주인....야구방망이 매타작한 대한민국 어느 재벌 회장

하지만 여종 손가락을 자른 주인도 있었다. 중종조 명재상인 송질의 딸이면서 조광조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삼정승을 지낸 홍언필 부인인 송씨가 그 사람이다. 송씨는 혼례식날 신혼방에 술상을 가지고 들어온 여종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그는 또 남편과 간통한 남의 집 여종을 수없이 매질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다. 심지어 매질 당해 쓰러진 그 여종을 생사 확인조차 하지 않고 땅에 묻었다.

이런 일은 조선시대만 있었을까? 매질 당하는 노비를 보면서 지난 2010년  아이를 둔 가장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한 재벌 대표가 생각났다. 당연히 매타작을 한 이는 법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그를 집행유예로 감경한 이유는 "피해자와 합의했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기본적인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한 조선 노비들 지위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야구방망이 휘두른 최아무개 회장도 여종 손가락을 자르고, 여종을 매질한 송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노비들은 죽어도 동정받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죽인 이들이 더 추앙받기도 했다. 정조 때 형조판서를,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서구는 노비를 때려 죽였지만, "번거로워 관아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혹자들은 "'젊은 친구'가 어쩜 그렇게 훌륭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기 까지했"다니, 노비는 사람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매타작을 한 재벌회장에 대해 분노할 줄은 알았다.

노비가 없었다면 조선을 굴러가지 못했을 것

노비도 노비 나름이다.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노비"가 있는가 하면, 남편을 과거에 급제시킨 여종도 있다. 무엇보다 재산을 축적하여 자식들에게 물려주거나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도운 노비도 있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충청도 진천에 사는 사노비 임복은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자 곡식 2000석을 바쳐 성종에 의해 면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같은 예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대다수 노비들은 양인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다.

나는 그동안 조선조 신분구조는 '사농공상(선비, 농부, 공장, 상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은이는 "법적으로 존재한 신분은 양인과 천민(노비)뿐이었다"고 말한다. 사농공상은 신분 구별이 아니라 "직역(職域)의 구별이었다"고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양인 중에도 사농공상이 있고, 천민 중에도 '사농공상'이 있다는 말이다.

1590년 통신사 허성을 수행한 노비 백대붕은 한시를 잘 지었다. 노비가 통신사를 수행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사를 짓는 노비, 기술을 보유한 공노비, 실무행정을 담당하는 노비 츨신 서리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조선은 노비가 없었다면 굴러가지 못했을 것이다.

"행정도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수공업제품의 생산도 노비들에 의해, 거기에다가 농업생산 역시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조선이란 나라는 기본적으로 노비들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였던 셈이다."(본문에서)

노비는 '마당쇠'와 '삼월이'가 아냐, 하지만....

이처럼 노비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마당쇠'와 '삼월이'가 아니었다. 물론 양인처럼 마음을 먹는다고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손가락이 잘리고, 매타작 당해 죽어도 동정을 받기는 커녕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산업생산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노비는 노동자와 흡사한 존재"였다.

조선 노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항했다. 왕과 귀족 지배층은 이를 공권력으로 막았다. 하지만 저항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1894년 노비제도는 공식 폐지됐다. 12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들은 치열한 생존권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김종성의 마지막 글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서민이 노동자 대중이라면, 옛날의 서민은 노비 대중이었다. 즉 이 둘은 자기 시대의 대표적인 서민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노비제 시대와 노동자 시대에는 역사 발전의 공통적인 패턴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패턴은 앞으로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덧붙이는 글 | <조선 노비들-천하지만 특별한> 김종성 지음 ㅣ 역사의 아침 펴냄 ㅣ 14000원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김종성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13)


#조선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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