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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교나 '유능한' 교사가 한둘은 있다. 어떤 사람들일까. 미미하지만 학교마다 그 색깔이 다르고, 학교가 소재하는 지역의 분위기가 모두 제각각이니 한두 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대강의 이미지는 얼마든지 그려볼 수 있다. 그 이미지의 기준은 '입시 공화국 대한민국'이다!

그들은 아이들을 잘 통제한다. 그 명목은 순전히 성적과 입시에 놓인다. 그들은 강압을 행사하면서도, 그런 강압이 아이들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이들에게 아주 교묘하게 주입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체벌도 마다하지 않을 때가 있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아이가 교사의 그런 체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체벌 교사에게 '유능' 딱지를 붙여 존경하는 일부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

그 '유능한' 교사들은 학생 인권 운운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생에게 공부만 시키면 되지 한가하게 무슨 인권 타령이냐는 식이다. 성적과 입시를 위해서는 인권 따위야 얼마든지 유예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신조다. '유능한' 체벌 교사를 일부 아이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도 그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두 종류의 단단한 바람막이가 그들을 앞뒤에서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관리자와 학부모들이 바로 그들이다. 대한민국의 교장들은 대체로 '일사분란'을 좋아한다. 그들이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관리하는 엄격한 교사를 좋아하는 이유다.

어느날 인권이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겉그림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겉그림 ⓒ 교육공동체벗
특별한 교육 철학을 갖지 않은 '평균적인' 대한민국 학부모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새부턴가 가정교육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교사들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두고 내뱉던 냉소적인 말들, 가령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길래'와 같은 말도 이젠 거의 들을 수 없다. 학부모들이 집에서는 손을 놓은 자기 자식들을 학교에서만큼은 엄격하게 통제하고 관리해주길 바라는 배경이다.

물론 간혹 자기 자식의 문제로 교사에게 찾아와 막무가내로 폭행하는 학부모에 관한 뉴스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사람이 개를 무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학부모들은 여전히 교사들에게 '우리 아이를 때려서라도 가르쳐줍소서' 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동안 그들의 유일한 생존 전략은 눈치 보기였다. 그럴듯한 훈계와 체벌 등으로 무장한 교사가 권력자로 군림하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아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는 교사라는 권력자에게 도전하는 반란자가 되었다. 교사들은 그 아이를 철저한 응징과 배제의 논리로 대했다.

그러던 어느날 변화가 찾아왔다. 이 책의 머리말 격에 해당하는 '책을 펴내며'에서 박복선 성미산학교 교장이 한 말마따나,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뜻밖의 선물"이었다. '인권'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격적인' 손님이었고,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손님이었다.

모두들 혼란스러워했다. 그들 '유능한' 교사들에게는 특히 충격적이었다. 인권은 그들의 존재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을 정도의 위력으로 다가왔다. 이쯤에서 한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외양도 건장하고 혈기왕성한 젊음까지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삶과 교육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으니 용기는 차고 넘쳤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내 지시를 잘 따랐다. 간혹 질서를 위반한 학생이 생기면 나는 일벌백계의 강력한 응징으로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나의 질서'를 유지해 갔다. 동료 교사들과 비교하며 내심 상대적 우월감을 즐겼고, 마치 내가 유능한 교사인 것처럼 착각 속에 갇혀 살게 되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전임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군대를 제대한 후에 찾아왔다.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뜻밖이기도 했다. 그 제자는 매우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으며 나와 관계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와 차 한 잔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지금도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십니까?" 아이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175, 176쪽)

광주 전자공고 교사인 임동헌 선생의 고백이다. 그는 전문계 고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이후 주변 교사들로부터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줄 알아야 유능한 교사라는 것을 직간접으로 배운 교사였다. 임 선생의 교직 경력은 전형적인 '유능한' 교사의 길을 잘 보여준다.

'97:3 논리', 외국인들 들을까 부끄러울 따름

나는 지금 대한민국의 정말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교사가 위의 임 선생님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유능하다'는 말을 교장과 학부모에게서 들으면서도, 그 유능이 결국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97%의 학생들은 학생인권조례가 없어도 잘만 생활"(65쪽)한다고 말하는 부류다. 또 그들은 "나머지 3%의 학생들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를 만든다면 다수 학생들이 입는 피해는 어떻게 할"(65쪽) 거냐며 격앙하기도 한다.

'97:3' 논리는 학생인권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대체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런 기괴한 논리를 외국인이 들으면 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끄러울 따름이다.

'97%의 학생은 안녕하고 단지 3%의 문제 학생만을 위해 학생인권이 존재한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오해가 깔려 있다. 과연 97%의 학생은 안녕한가. 대다수 학생이 교사의 지도나 학교 방침에 대해 눈에 보이는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학생인권의 소용없음이나 학생인권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학교 규율을 의식적으로 위반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현실에 만족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65, 66쪽)

학교와 교사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서 '찍' 소리 한 번 내지 않고(못하고) 자란 아이들에게 어떤 유익함이 있을까. 그저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으니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시스템에 유순하게 복종하는 '원만한 사회인'을 만들어냈으니 이 사회가 크게 고마워해야 하나.

나는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이 사회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래도 내 말이 못마땅하다면 이른바 'SKY'를 졸업한 이 나라의 '점수 벌레'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좌지우지해왔는지 한 번쯤 심각하게 살펴보기 바란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는 관리자에게 '나쁜' 교사?

이 책의 제목인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이란 문구는, 이 책의 공동 저자 14명이 쓴 서로 다른 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학교에서 인권과 교육은 어떻게 공존해나가야 하나.

몇 년 전 일이다. 교문에서 복장 문제로 걸린 우리 반 아이가 학생부 교사의 지시로 내게 '보고'를 하러 왔다. 귀에 걸린 조그만 귀고리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괜찮으니 학생부 선생님께 다시 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라고 했다. 그후 그날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그 학생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생겼다. 그런데 그가 뜬금없이 "정 선생은 좋은 선생이어서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말에 어떤 가시 같은 것이 박혀 있는 듯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칭찬이 아니죠?"하고 반문하자 그는 며칠 전의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딴에는 담임 교사에게 야단 좀 맞고 오라고 아이를 나무라며 보냈단다. 그런데 아이가 내려와서는 담임 선생님은 괜찮으시다는데 왜 유독 선생님만 난리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쳐서 솔직히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좋은' 선생이 되고 자기는 '나쁜' 선생이 되었으니 그게 당신(나) 잘못 아니냐는 논리다.

순간 그 녀석이 괘씸했다. 하지만 '좋은' 선생, '나쁜' 선생 운운하는 그 선생님의 논리에 더 화가 났다. 나는 내심 치솟아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그에게 말했다. "나만 좋은 선생 되는 건 서운하니 선생님께서도 아이들을 편하고 따뜻하게 대해 좋은 선생님이 돼 보세요. 아주 좋아요"라고 말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는 관리자에게는 '나쁜' 교사로 찍혀 있을 개연성이 높다. 거꾸로 관리자에게 '유능한' 교사는 아이들에게는 '무능하고 무식한' 교사일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의 인권을 교육 현장에서 최대한 보장해주려고 애쓰는 교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

나는 이런 상황이나 분위기를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동료 교사들이나 교장 등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 보라고 말이다. 교육 현장 속에서 아이들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해 줄 때, 아이들도 우리 교사를 자연스럽게 존중해주지 않을까.

여기저기서 수업 못 해먹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교사들이 많다. 툭하면 '인권'을 들먹이는 아이들 앞에서 자신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며 하소연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아우성'과 '하소연'은 얼마나 초점이 빗나간 것인가.

나는 교사가 수업의 100%를 책임져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과정 입안자나 교과서 집필자는 문제가 없는가. 그러니 교사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아우성 칠 필요가 없다. 또 교사는 교육 전문가이지 통제나 처벌의 전문가가 아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모든 아이에게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 어떤 경우에든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최대한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때로는 동료 교사나 교장이나 교육 당국과 부딪힐 각오도 해야 한다. 그런 용기 하나 없이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에게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교사는 부모와 더불어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한 낱 외 13인 공저 | 교육공동체 벗 | 2012.03 | 1만 3천 원)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

한낱.최형규.조영선 외 지음, 교육공동체벗(2012)


#인권#학생인권조례#교육#좋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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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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