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은 안중근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2010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되는 해였다. 100주년이 되기 몇 달 전, 안중근의사의 일대기와 의사의 가족 이야기를 쓴 <안중근 불멸의 기억>(추수밭,2009)과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IWELL,2009)를 특별한 감회로 읽었었다.
이후 한동안 이제까지 독립운동가 혹은 영웅으로만 만났던 안중근의사가 아닌 인간 안중근의 삶 그 편린들과, 세상 사람들이 잊어버린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한 애잔함 등이 엉켜들어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안중근순국 백년-<안의사 유해를 찾아라>(EBS 2010.3.26)는 이런 와중에 접한 프로그램인데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어서 조국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사람인지라 무척 간절한 마음으로 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인상 깊게 기억돼 버리고, 가끔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런 장면이 있다. <안의사 유해를 찾아라>를 통해 처음 접한 영화 <애국혼>의 이 장면도 그중 하나. 일제강점기의 우리 영화를 좀 더 알고 싶은 막연한 관심을 두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관심을 접어야만 했다.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것이란 비슷한 내용의 글 몇이 전부일 정도로 관련 자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로 간 한국 영화인들이 처음 만든 영화<애국혼>은 각본·감독·주연 정기탁, 여우주연 정일송으로, 이 영화의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조국을 떠나온 이들의 염원을 담은 영화였다. 한일 합병의 치욕을 강요했던 일본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안중근 의사의 애국투혼이 담긴 영화가 바로 <애국혼>이다. 한국에서 만들어 한국의 민중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영화 <애국혼>은 비록 한국에서는 만들지 못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영화였다. 1928년, 상하이로 간 정기탁은 당시 교포사회에서 읽히던 박은식의 <애국혼>을 읽고 시나리오화했다. 그는 상하이 영화계에 진출하기 위해 이 시나리오를 들고 여운형과 함께 당시 3대 영화사 중 하나인 '대중화백합영편공사'를 찾는다. 여운형의 도움으로 안중근 의사의 영화화는 선뜻 받아들여졌고 이 영화의 감독 주연까지 본인이 맡게 되었다.-<한국 영화 100년사>에서우리 영화 100년을 정리 기록한 <한국 영화 100년사>(북스토리 펴냄)는 몇 년 전 관심을 두었었으나 자료가 거의 없어 아쉽게 접어야만 했던 일제 강점기 우리 영화에 관한 관심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영화에 관한 관심 때문에 읽게 된 책
책에 의하면 <애국혼>은 중국 영화사는 물론 우리 영화사와 독립운동사에도 무척 중요한 영화다. 상하이에서 한국인들의 주도로 기획 제작된 첫 영화로, 민족영화인 <아리랑>의 맥을 잇는 동시에 유일한 항일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중국 상하이로 간 영화인들이 상하이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영화계에게는 항일영화의 모범이, 한국영화계에는 항일영화의 효시로 모범이 되는 등 여러 의미가 함축된 영화라고 한다.
<애국혼>은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리던 중국 상하이에서 만들어져 중국인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영화는 중국인들에게 우리의 항일의지를 알리는 동시에, 중국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을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항일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른, 때문에 우리 영화사에 무척 중요한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중국 베이징 영화자료관에 16장의 스틸(위 영화 화면도 그중 하나)만 남아있을 뿐,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더불어 아쉬운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애국혼>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던 이른바 '상하이파 한국영화인'들이 우리에게 거의 잊혔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에서 만들 수 없었기에 상하이에서 제작되어야 했던 이들의 영화를 한국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촬영 장소가 중국이고, 관객들이 중국인이며 제작사의 국적이 중국이기 때문에 상하이파 영화를 한국영화사의 연구대상에서 뺄 수는 없다고 사료된다. 상하이파 영화들이 갖는 영화사적 의의는 초창기 영화사의 복원이며 영화사의 공백기를 채우는 의미가 있다. 민족영화의 맥을 이으며 최초의 항일영화로 후대에 끼친 영향과 의의가 적어도 한국영화사의 큰 연결고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영화사에도 기록된 상하이파 영화인들의 활동은 이제 한국영화사의 한 부분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 100년사>에서상하이파 한국영화인들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이들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상하이파 한국영화인들은 우리에겐 낯설다나운규에 의해 1926년에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상영된다. 그러나 일본의 간섭으로 많은 부분들이 삭제된 상태로 개봉된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에선 일본의 통제 때문에 온전한 민족혼이 깃든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일부 영화인들이 당시 동양의 할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영화 산업이 발달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기탁, 전창근, 이경손, 정일손, 한창섭 등이다.
이들이 상하이로 간 1920년대 말은 일제의 영화 검열이 강화된 시기다. 이들 상하이파 영화인들은 상하이에 먼저 건너가 거주하던 김명수, 김광주 등과 함께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한다. 이들에 의해 당시 만들어진 영화는 정기탁의 <애국혼>을 시작으로 우리 민족혼과 항일의지, 사회모순비판과 변혁의지 등을 주제로 한 영화 13편이다. 그러나 현재 상하이파 영화인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는 우리 영화사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영화 100년사>는 '한국영화사의 숨겨진 이야기-상하이파 한국영화인'을 통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도 잊힌 영화 <애국혼>과 민족혼을 제대로 담은 영화를 만들고자 이국을 택했던 '상하이파 영화인들'의 행적을 집중 조명한다.
누구도 하지 않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버림받은 한국영화사에 대한 애착의 글들이라 할 수 있다. 지독한 한국영화 짝사랑의 결과물이다. 내 젊은 날을 보내며 사랑했던 한국영화에 대한 연서일 수도 있다. 영화를 업으로 삼으려고 작정하기 전부터 한국영화를 보기도 많이 보았지만, 정리는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러한 것처럼 지금 한국영화사의 많은 부분들 또한 정리되지 않고 또 때로는 왜곡된 연구물로 남아있다. 게다가 하위 장르영화에 대해선 또 얼마나 인색한가? 영화배우 故 장혁을 검색해보면 어디에도 그와 관련된 자료는 없다. 지금 활동하는 배우 장혁의 자료만이 나온다. 그만큼 옛 한국영화에 관한 자료가 부재한 시대이다. 없어진 한국 영화의 필름만큼이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한국영화 100년사> '머리말'에서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다큐멘터리 '안중근순국 백년-<안의사 유해를 찾아라>(EBS 2010.3.26)를 비롯한 다양한 다큐멘터리들을 30여 년간 제작함으로써 '다큐멘터리 명장'이란 별칭이 붙었다는 안태근 PD. 지난 30년 동안 취재한 것들을 바탕으로 천만 관객 시대임에도 정작 그 자료는 부실한 한국영화 100년을 모두 6장에 걸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영화의 많은 부분들을 담당하는 중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음은 물론 이렇다 할 조명조차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기획부장이나 조명담당 등과 같은 영화 스태프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주고 있음도 결코 간과해선 안 되는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덧붙이면, 우리 민족이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영화의 맥을 이었음에도 우리 영화사에서는 말하지 않는 상하이파 한국 영화인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들에 관한 자료들은 중국영화사의 기록과 당시의 중국 신문이나 잡지 기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부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들이 이제라도 제대로 조명받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한국영화 100년사>|안태근 (지은이) | 북스토리 | 2013-03-20 |정가 3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