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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마녀 라니야. 일곱 살 천방지축 소녀는 하루 종일 집안과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귀엽게 생긴 이유로 동네 남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여성스러움을 포기하고 앞서서 대장 노릇하는 걸 좋아한다.
 꼬마마녀 라니야. 일곱 살 천방지축 소녀는 하루 종일 집안과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귀엽게 생긴 이유로 동네 남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여성스러움을 포기하고 앞서서 대장 노릇하는 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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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줘! 놀아줘~어, 빨리~이!"

아침부터 떼를 쓰는 꼬마마녀 때문에 달콤한 늦잠은 일찌감치 포기한다. 천진난만한 일곱 살 개구쟁이 라니야는 지치지도 않나보다. 전날 밤까지 농익은 아이 다루는 기술로 신나게 무등 태워주고, 바이킹도 해주고, 회전그네까지 태워줬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찰나의 짜릿한 스릴을 못 잊는 마약 같은 놀이들이다. 강렬한 체험을 잊지 못한 녀석은 아침 고양이 세수하기도 전에 놀아달란다. 왕성한 운동량을 자랑하는 아이는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다. 더구나 오늘처럼 유치원 쉬는 날의 녀석은 세상 모든 행복을 다 가진 무적파워 런닝맨이 된다.

전통가옥 리아드(Riad)에 아침 햇살이 스며든다. 기지개를 켜고 위를 보면 네모난 하늘이 뻥 뚫려있다. 텅 빈 사각형의 독특한 구조, 중앙 공간은 마당 겸 거실 겸 사랑방으로 쓰이고, 네모난 건물을 따라 식구들마다 방이 배분되어 있다. 라니야의 할머니는 빵과 잼, 민트 차, 과일들로 아침을 준비한다. 저녁마다 만찬을 준비하며 이방인을 깊이 감동시켰었다. 그녀의 넉넉한 인심과 온유한 인품을 빼닮은 첫째 아들 모함메드가 라바트 메디나에서 방황하는 나를 집으로 초대한 것이 사흘 전 일이다.

"문, 잘 먹어주는 게 예의야. 어머니께서 손님 왔다고 특별히 신경 쓰셨거든."
"괜찮은데…. 난 그냥 너희 가족 먹는 그대로 먹어도 감사해. 괜히 부담 갖지 않았으면 해."
"내가 한국에 여행 간다면 말이야, 아마 네 어머니께서도 똑같이 대해주시지 않을까?"

둘째 제임스는 영어 이름으로 불러달란다. 여행 가이드를 하는 까닭에 제법 준수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 초대는 모함메드가 했지만 집에 와서부터는 둘째인 제임스가 날 챙겨주고 있었다. 모함메드는 성정이 워낙 순박한지라 마주치면 인사하고 웃는 게 전부다. 제임스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니 가끔 꾀도 낼 줄 안다. 어느 날은 지도를 들고 내게 모로코 여행 개론을 일목요연하게 훑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둘은 라니야가 마냥 재롱부릴 수 있는 든든한 삼촌들이다.

'꼬마마녀' 라니야의 최대 적은 막내이모

 모로코 라바트에서.
 모로코 라바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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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식구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 대청소를 한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통에 정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손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나는 밥값이라도 하려고 마당 청소를 도맡았다. 꽤 널찍한 공간인데다 흙이 아닌 타일이었으므로 쓸고 나서 다시 물걸레질을 해야 했다. 물 만난 라니야는 신이 났다. 나가서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고 싶을 텐데 제 딴엔 청소 돕는다고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호스 들고 구석구석 물을 뿌린다. 귀여운 녀석, 대견한 면이 있는 걸 그때 처음 보았다.

"받아라, 내 물총! 푸하하하!"

호스의 구멍을 내게 향하고 세상 티 없이 해맑게 웃는 녀석, 대견한 건 취소다.

라니야네 집엔 친척 언니와 두 명의 이모도 함께 산다. 그러니까 이 집엔 녀석의 시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작은 이모, 막내 이모, 친척 언니, 두 삼촌, 그리고 손님인 내가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꼬마마녀는 제 위치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능글맞게 행동하기 일쑤다.

어떨 땐 시키지도 않은 노래를 굳이 가족들 불러다 놓고 부르는데 들어줄 만한지는 나중 문제다. 한 번 부르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다. 한 곡 끝나고 으레 잘했다 박수 쳐주면 기분 좋아져서 숨 한 번 쉬고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예상치 못한 돌발에 청중들은 살짝 긴장하고 두 곡까지는 어른의 포용으로 들어준다.

하지만 말리는 타임을 놓치고 세 번째 곡으로 넘어갈 땐 다들 적잖이 난처한 표정들을 감추느라 애를 쓴다. 나로서는 솔직히 땡볕에 운동장에서 듣는 교장 선생님 훈화 시간만큼이나 좀이 쑤셨다, 실력? 불현듯 '아, 신은 녀석에게 미모를 주고, 목소리를 가져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모로코 라바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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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 라바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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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야의 최대 적은 막내 이모다. 그녀는 영락없는 새침한 아가씨였는데 집안 대청소를 할 때도 부모님과 언니들, 손님인 나까지 팔을 걷어붙이는 상황에서 무슨 심보인지 혼자만 의자에 앉아 멀뚱멀뚱 쳐다보던 난감한 캐릭터였다. 그녀의 태도가 이목을 끌 때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창 흥이 나 있는 꼬마마녀를 불러다 혼낼 때다. 그럴 때면 녀석은 풀 죽은 모습으로 삼촌들에게 가서 말없이 안기며 위로를 갈구한다.

또 다른 하나는 집을 나설 때다. 갓 스물을 넘긴 레이디의 외출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기 그지없다. 세련된 화장도 돋보이지만 특히 향기는 온 집안에 향수를 뿌린 것처럼 진하게 퍼진다. 아마도 라니야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위풍당당함은 괜히 얄미울 것이다. 수수한 차림과 외모의 식구들과는 달리 누가 봐도 예쁜 매력은 그녀가 메리트로 삼는 무기니까. 그녀의 외출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도 종잡을 수 없다. 이쯤 되니 식구들도 그녀의 개인주의에 체념한 듯했다.

"남자 친구가 만날 바뀌는 거지. 용돈도 변변찮은데 옷은 매번 바뀌고, 화장품이랑 향수는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다니까. 내 친구도 선물 공세를 했는데 결국 마음까진 받지 않더라고."

어쩌면 라니야 이 녀석, 막내 이모를 미모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막내 이모를 향한 꼬마마녀의 새치름한 표정을 볼 때마다 물음표는 느낌표가 되어간다.

할머니에게 맞아 우는 아이를 또 때린 엄마

 모로코 라바트에서.
 모로코 라바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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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 라바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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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대청소가 있던, 그날 밤에 일어났다. 막내 이모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아 보였다. 라니야 할머니가 그녀에게 핀잔을 준 것이다. 엄마로서 손님까지 저렇게 청소를 도와주는데 혼자 거드름 피우는 막내딸의 철없는 행동에 화가 났었나 보다. 마침 밖에서 동네 친구들하고 놀다 온 라니야는 흥이 가시질 않았는지 집 안에서도 방방 뛰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 녀석의 나이를 고려하면 촐랑대는 모습도 마냥 귀엽게 봐줄 만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내 이모는 달랐다. 평소에도 꼬마마녀의 킬러였는데 오늘은 민감했던 터라 제대로 트집을 잡았다. 그녀는 라니야를 호되게 꾸짖고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달뜬 아이를 어떻게 말 한 마디로 제어할 수 있을까? 라니야는 든든한 제 편이 되어 줄 나와 삼촌들 편으로 왔고, 까불기를 멈추지 않았다. 과일을 들며 담소를 나누는 남자들에겐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아이의 행동이었지만 어느 순간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순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 번 더 라니야의 태도를 나무란 그녀는 누가 봐도 엄마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할머니가 조용히 좀 하라며 되레 라니야의 입술을 때리는 것이었다. 평소 꼬마마녀를 가장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집안 식구 중에 가장 인격적인 언행의 소유자가 아니었던가?

세 번째 장면은, 진정으로 아니 일어났으면 좋았을 뻔했다. 라니야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맞아 우는 아이를 다시 때렸다. 참 매정해 보였다. 무슬림의 가정교육이 이리도 엄했었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라니야는 머리부터 입술, 등짝까지 어른들의 매서운 손맛을 봐야했다. 펑펑 우는 아이를 두고, 이 광경을 본 남자들은, 그러니까 라니야의 할아버지까지, 다들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어떻게 이 묘한 카르텔을 깰 수가 없었다. 말리는 이 아무도 없이 라니야는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울음소리는 몇 분 간 계속 되었다.

집안 여자들이 단체로 뿔이 났고, 남자들은 풀이 죽었다. 엄마는 자기 딸이 할머니에게 맞은 것이 서운했을 수도 있다. 엄연히 자신이 키우는 하나뿐인 혈육 아닌가?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막내딸의 철없는 행동에 마땅한 희생양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막내딸은 막내딸대로 엄마에게 서운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세 여자의 보이지 않는 갈등에 희생양은 결국 가장 만만한 라니야가 되었고, 못난 남자들은 그냥 그렇게 계속 못나게 헛기침만 해야 했다.

'삼촌 잊지 마라, 그리고 반드시 행복해져라'

 모로코 라바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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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야는 분명 또래 아이들보다 많이 개구지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과한 액션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천방지축 꼬마마녀에겐 가장 중요한 아빠가 없었으니까. 오래 전에 이혼했단다. 엄마 품에서만 자라오면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을까? 또 얼마나 자신을 알아주는 동시에 안아주는 이를 필요로 했을까?

라니야가 기댈 수 있는 남자 어른은 삼촌들뿐이다. 하지만 큰 삼촌은 모로코에선 다소 늦은 나이인 서른이 가까워 오도록 변변한 직업 없이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고, 작은 삼촌 역시 가이드란 명목으로 자주 집을 비우다 보니 집안을 이끌어 갈 만한 위치는 아니다. 라니야의 허한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 아빠 역할은 없는 셈이다. 

라바트를 떠나는 날 아침, 라니야의 표정은 몹시도 뾰로통해져 있었다. 이별을 준비하며 멋쩍게 서 있는 나는 달랑 사흘 놀아주고 떠나가는 나쁜 남자가 된 것만 같았다. 살갑게 어울리던 사이가 차갑게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 인사로 악수를 청했지만 녀석은 끝내 엄마 뒤로 몸을 숨길 뿐이었다. 분명 녀석도 인사하고 싶을 텐데 어린 마음에 또 상처받긴 싫은가 보다. 한 번 더 꼬마마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인지 모르겠다.

한 아이의 마음을 얼마만큼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단순한 소통이 때론 가장 어려울 때가 있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완전하게 순수해야 하니까. 아마 어렴풋이 그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일테다.

'꼬마마녀, 만나서 반가웠다. 삼촌 잊지 마라. 그리고 반드시 행복해져라!'

 라바트의 메디나 성벽. 메디나 안쪽으론 거대한 바자르(시장)가 형성되어 있다. 사기꾼 많으니 주의할 것.
 라바트의 메디나 성벽. 메디나 안쪽으론 거대한 바자르(시장)가 형성되어 있다. 사기꾼 많으니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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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http://blog.naver.com/miracle_mate)에도 올릴 계획입니다.



#서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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