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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엽서를 쓰고 많은 사람이 들락날락 하는 건물에 두고 나오는 일은 목숨을 걸만큼 위험천만했다. 중년의 남자는 처음엔 마음 졸였지만 점차 이 일에 익숙해졌다. 밖에서 망을 보던 그 남자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국 부부는 이 일로 경찰에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반정부 구호를 쓴 엽서를 써서 뿌렸다는 이유로 처형이라니,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벌어졌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괴물과 맞선 사람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책 표지
 책 표지
ⓒ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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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를 했기에 붙잡혔어도 냉정할 수 있었던 이들 부부. 그러나 2년 동안 뿌린 엽서 276통 중 18통을 제외하고 고스란히 게슈타포의 손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 쓰러질 뻔 한다.

엽서를 읽은 사람들이 말을 전하고 전해서 언젠가는 독일 국민이 들고 일어나리라는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며 게슈타포에 곧장 신고했다. 18통도 신고만 안 했다 뿐이지 오해를 살까봐 불태우거나 감추거나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했던가. 그것도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놓고서.

독일 작가 한스 팔라다(1893~1947)는 1945년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 서류에서 한 부부가 반 히틀러 구호를 적은 엽서를 배포하다 1943년 처형되었다는 글을 읽고 이 부부의 이야기를 <누구나 홀로 죽는다>라는 소설로 썼다. 그것도 4주만에.

작가가 무모하기 짝이 없고 외롭고 가망없는 싸움을 한 이 부부에게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가 미쳤을 때 온전한 정신으로 살려는 것 자체가 중요

한스 팔라다는 이 작품에서 유대인 대학살과 수많은 전쟁을 벌인 나치의 만행 자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나치라는 거대한 악과, 침묵과 두려움으로 그에 동조한 독일시민들, 자기 업무에 충실한 게슈타포, 이웃을 염탐해 먹고사는 협잡꾼, 그 와중에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책 뒤표지에 적힌 말)을 보여줄 뿐이다. 가령 이렇게.

장면 하나

4층에 남편이 게슈타포에 끌려가 혼자 사는 유대인 여자가 있다. 이 건물에 사는 사람 중 일부가 이 여자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려 한다. 여자는 유대인이니까 물건을 가져가도 상관없다는 게 이들 생각이다. 소란 중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경찰 역시 이 여자의 물건을 뺏으려는 와중에 여자는 떨어져 죽는다.

장면 둘

엽서 배포 사건을 수사하던 게슈타포 경감은 조금 더 기다리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상관은 그럴 생각이 없다. 수사회의에서 경감이 기다리자는 자기 생각을 밝히자 상관은 자기 말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위대원 둘에게 시켜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경감을 흠뻑 두들겨 팬 후 지하 감옥에 가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를 지닌 게슈타포의 경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죄수가 되어버렸다.  

장면 셋

재판정에 선 부부를 향해 죄를 인정하느냐고 묻는 재판장. 부부가 순순히 죄를 인정하자 화가 치민다. 호통치고 욕해줘야 하는데 죄를 인정하니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 재판장은 피고가 매우 인색한 사람이라느니, 비열하다느니, 야비하다느니 하며 욕을 해대며 재판을 질질 끈다. 급기야는 교수형도 아깝다, 능지처참을 당해야 한다고 소리 지른다. 판사가 말이다.

검사도 뒤지지 않는다. 부인에게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남자관계를 몇 번 했느냐고 묻는다. 피고인이 도덕성이 낮은 사람이었고 모든 범죄가 다 가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재판장은 한술 더 떠 사건과 관계가 있으니 질문에 답하라고 한다.

변호사는 어땠을까. 자신의 의뢰인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범죄를 다 저질렀기에 자신은 이런 범죄자를 변호할 능력이 없다면서 철저하게 정의를 구현해 달라고 말한다.

 히틀러에 열광하는 독일인들
 히틀러에 열광하는 독일인들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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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은 이런 세상이었다. 대학살과 전쟁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독일은 '지옥'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이 아귀(성질이 사납고 지독히 탐욕스러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되거나 사람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부부는 사람을 선택했다. 비록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렸지만 이들은 부질없는 짓을 함으로써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작가가 이 부부의 이야기를 쓴 이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하라"고 했다. 이 책 표지에 적힌 말처럼 '중요한 건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다. 오늘도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외롭고 가망없어 보이는 싸움을 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 줄 책이다.

덧붙이는 글 | <누구나 홀로 죽는다> 한스 팔라다 장편소설/이수연 옮김, 씨네21북스 펴냄, 2013년 1월 18일, 786쪽, 1만 6000원



누구나 홀로 죽는다

한스 팔라다 지음, 이수연 옮김, 씨네21북스(2013)


#누구나 홀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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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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