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5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키 163cm, 몸무게 37kg의 가냘픈 체구에, 정상인의 폐기능 20%만으로 희귀병과 사투하며, 원폭2세환우로서의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그는 모두에게 그 불덩이를 안겨주고 8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형률입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엮어낸 유고집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2006년 5월, 김형률추모사업회 발행)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 지나간 영상자료와 글, 신문기사와 그가 남긴 온갖 흔적을 되찾아가며 날마다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로 와서 꺼지지 않은 뜨거운 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김형률은 1970년 부산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란성 쌍둥이였던 동생은 1년 6개월 후에 사망했습니다. 김형률도 태어나면서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 잦은 감기로 고생하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6년 시절 내내 학기마다 늘 한 달 이상씩 결석을 해야 할 정도로,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급성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로는 줄곧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습니다. 그의 쌍둥이 동생을 앗아간 병도 바로 폐렴이었습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폐렴으로 입원을 하자 정확한 병인을 알기 위해 특수 피검사를 한 결과였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모친이 원자폭탄 피폭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환자의 병과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지만 그 이상의 언급은 피했습니다. 반복적인 폐렴으로 폐기능의 80%를 잃고 나머지 20%에 의지하여 호흡하며 살아가던 형률씨는 6년 뒤 급성폐렴이 재발하여 다시 입원해 있던 중 우연히 자신의 병과 관련된 유전학적 임상 연구논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김형률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그는 원폭피해자 문제에 관련된 국내외의 온갖 자료를 필사적으로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나는 왜 아픈가,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리고 2002년 봄 대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적인 자기 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33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며 살아 왔습니다. 저와 같이 선천적 질병에 걸려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많은 원폭2세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일본의 원폭1세들처럼 피폭자 원호법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후 형률씨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전국 각지의 시민단체와 학자, 변호사, 의사, 정부와 국회 관계자를 만나 국내 원폭2세환우의 실정과 정부 차원의 대책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지 8년이 흐른 지금도 '원폭'이라든가 '2세'라는 단어가 나오면, '김형률'이란 이름을 곧바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형률은 전국을 돌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을 원폭2세환우를 찾기 위해 회원모집 활동에도 나섰습니다.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실태조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고, 실제로 국내 최초 한국 원폭피해자 2세 건강실태조사를 이끌어냈으며,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정책요망서를 보내거나, 국회에 특별법 제정 청원서를 제출하여 국내 원폭피해자 1, 2, 3세 환우들을 위한 입법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전에도 원폭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법안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국내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회 사상 처음으로 실제 법안이 발의된 것(제정되지는 못했지만)은 2005년이었습니다. 2002~2005년은 김형률이 '원폭2세환우'운동가로서 살아간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원폭2세환우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하여 온 삶을 불태웠던 그는 안타깝게도 2005년 5월 29일 아침, 부산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로 지인들에게 메일을 보내며 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평생을 죽음의 그림자와 늘 함께했던 외로운 삶이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한국 사회에 많은 것을 남겨주었습니다.
오는 5월 25일이면 부산민주공원에서 그의 8주기 추모제가 열립니다. 해마다 5월이면 그가 던져주고 간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오릅니다. 김형률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또 다른 김형률들이 아픈 몸과 마음을 이겨내고, 핵 시대의 증언자로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김형률이 만든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65명이었던 것이, 2013년 5월 현재 전국 회원 수가 1300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한국원폭2세환우회(한정순 회장)를 중심으로 국내 24개 시민사회단체와 대표적인 종교계가 함께 뜻을 모아 새롭게 결성한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 연대회의'는 19대 국회에서는 기필코 원폭피해자와 2,3세 환우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자 오늘도 힘차게 싸우고 있습니다.
올해는 원자폭탄 투하로부터 68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는 김형률이 던지고 간 불덩어리를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옮겨 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더 많은 김형률들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걱정 않고 치료 받으며, 당당하게 가슴펴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국회와 정부, 그리고 사회가 나서서 원폭2세환우문제를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그 첫걸음이 될 특별법 제정의 원년으로 삼고자 합니다. 형률씨,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