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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산청, 마당 넓은 36년 된 한옥에서 아이들과 지낸 지 한 달이 넘었다. 목련꽃이 얼굴을 내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목련나무의 초록이 눈부시다. 그 사이 아빠의 49제가 지났고, 꼬물거리던 셋째의 백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함부로 쏜 화살같이 흐르는 봄날이다.

아빠의 부재를 대신하기 위해 친정에서 봄을 보내기로 계획할 땐 친정 엄마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빠가 마당 곳곳에 뿌려놓으신 봄의 흔적에게 위로 받으려 했다. 하지만 세 아이들과 넓은 한옥 살림을 하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봄날의 외할머니와 산책, 따스한 유년의 기억이 되길.
 봄날의 외할머니와 산책, 따스한 유년의 기억이 되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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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들과 북새통을 이루며 친정에서 머물고 있는 봄날이 아까워 뭔가 의미 있는 걸 해보자 궁리하던 중, 언젠가 친정 아빠께서 아이들을 보시며 툭 던지신 말씀이 생각났다.

"요즘 애들은 말만 하면, 아니 말도 하기 전에 뭐든 다 이뤄지니 부족한 게 하나도 없구나. 이런 애들이 자랐을 때를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하다."

세 아이를 돌보느라 기진맥진 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하지 않게 키워야지 하면서도 부족함 없이 키우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하루 하나씩 허락되는 과자를 하루 종일 아껴 먹고, 몇 개 없는 장난감을 보물처럼 간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집을 보니 집안 곳곳 먹다 만 과자가 굴러다니고, 사놓고 읽어주지 않은 책도 쌓여가고, 장난감 상자는 넘치다 못해 정기적으로 버리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부족함 없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금처럼 자라면 결핍에서 오는 간절함,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과연 얼마나 알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결핍을 통한 육아, 장난감 없이 살기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육아환경과 방법에 대한 중간점검을 하기로 했다, '결핍'을 통해서!  TV 프로그램 <인간의 조건>처럼 아이들에게 일정기간 뭔가 없이 살게 하고, 나 역시 뭔가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 미션.

아이들은 결핍을 통해 뭔가의 소중함을 느끼며 스스로 자랄 것이고, 나는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변명을 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션을 시작했다. 그 처음으로 시작한 게 '장난감 없이 살기'.

아파트와 달리 자연 속의 외가는 장난감이 없어도 놀 게 많은 곳이다. 겨우 내 답답한 아파트에 갇혀 지내다 탁 트인 외가에서 봄을 보내니 장난감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신나는 날들이다. 넓은 마당엔 좋아하는 모래, 흙, 돌, 풀, 꽃이 가득하고 축사엔 이제 소는 없지만 외할아버지가 손주들을 위해 남겨놓고 가신 토끼와 닭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버섯농장, 미술학원, 도서관, 성당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니 하루가 짧기만 하다.

여기에 뭘 해도 엄마와는 달리 화를 내거나 야단치지 않는 외할머니가 계신 외가는 장난감이 없어도 아이들에게 천국이다.

모래놀이, 물놀이는 해도해도 재밌어!
 모래놀이, 물놀이는 해도해도 재밌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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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아이들이 제일 먼저, 가장 자주 갖고 노는 건 마당의 모래와 돌멩이. 아이들은 어딜 가든 모래와 돌멩이만 보면 주저앉아 갖고 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서울에선 늘 모래와 돌이 부족했다. 이마저도 좀 갖고 놀만하면 집에 가야했는데, 외가에 오니 마루문만 열고 나오면 사방에 모래, 흙, 돌이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강가에서 고운 모래와 자갈을 한가득 담아와 이를 깨끗하게 씻어 볕에 말린 뒤 마당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깔고 모래놀이판을 만들어 주셨다. 값비싼 수입 실내모래놀이 셋트와는 비교도 안되는 외할머니표 모래놀이에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며칠을 놀았다.

여기에 내가 어릴 때 놀았던 것처럼 모종삽, 못쓰는 그릇, 작은 화분 몇 개를 창고에서 꺼내 주었다. 찌그러지고 깨진 그릇들이 아이들 손에서 순식간에 멋진 장난감이 되었다. 늘 같은 장난감으로 싸우던 까꿍이와 산들이는 싸우지 않고 놀기까지 했다.

퐁당퐁당. 하루 종일 하고 싶어요.
 퐁당퐁당. 하루 종일 하고 싶어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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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놀이보다 좋은 퐁당놀이

아이들이 모래놀이만큼 좋아하는 물에 돌 던지는 퐁당놀이. 특히 둘째 산들이는 물만 보면 괴성을 지르며 좋아했고 돌을 던지고 싶어했다. 가끔 시간을 내 강가와 저수지, 시냇가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퐁당놀이를 하게 해주었지만 늘 산들이의 울음바다로 끝이 났다. 끝도 없이 계속 퐁당놀이를 하고 싶은 산들이와 지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실랑이는 힘들기만 했다. 그러자 아이들의 해결사 외할머니는 마당에 큰 통을 설치해 물을 채워 주셨다.

영차영차 나 힘 세지?
▲ 꼬마일꾼 영차영차 나 힘 세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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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들은 퐁당놀이로만 그치지 않았다. 모래놀이를 하던 그릇을 가지고 와 물놀이를 시작했다. 물통에 모래를 붓고, 물을 퍼내고, 여기저기 물을 부으며 놀더니 급기야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놀다보니 목이 말랐고, 물이 눈앞에 있으니 마셨고, 마시다 보니 재미도 있어 두 녀석은 깔깔대며 물을 마시고 뿜어대며 놀아댔다. 몇 번이고 물을 마시면 안 된다 일렀지만 아이들은 놀 때마다 물을 마셨고, 목욕하면서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물을 마셨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정말이지 끝이 없나보다. 다행히 아직까지 아이들은 배탈 없이 잘 놀고 있다.

모래놀이도 퐁당놀이도 재미있지만 오래 해봤자 한두 시간. 아이들은 끊임없이 마당을 돌아다니며 놀거리를 찾았다. 호기심 많고 응용력이 좋은 까꿍이는 새로운 거리를 잘 찾아냈다.

소 사료를 옮길 때 쓰는 수레를 찾아내 밀고 다녔고, 버섯 말리는 대에 매달려 철봉놀이를 하고, 버섯 선별할 때 쓰는 둥근 의자를 목에 걸고 작은 북 놀이를 하기도 했다.

뭐든 누나 따라하는 산들이가 이 모든 걸 따라하는 건 당연한 일. 이런 산들이 때문에 까꿍이는 뭔가 새로운 놀이감을 찾아낼 때면 꼭 두 개를 마련해 동생과의 싸움을 피하려 애썼다. 이런 손주들 때문에 외할머니는 빗자루도, 파리채도, 의자도 다 두 개씩 준비하느라 덩달아 바쁘셨다.

외할아버지의 유산 뒤뜰 동물원, 앞뜰 텃밭

장난감을 대신하는 외가의 놀거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외할아버지가 남겨주신 토끼와 닭, 칠면조가 뛰어노는 '동물원'이 외가 뒤뜰에 펼쳐져 있다.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풀을 뜯어 먹이를 주고 외할머니와 함께 달걀을 꺼내와 달걀 요리도 해먹었다. 얼마 전엔 토끼가 새끼를 낳아 아이들은 막내 복댕이만큼 새끼 토끼들을 아끼며 보살피고 있다.

체험은 가축들 먹이주기에 이어 텃밭으로 이어졌다. 외할머니를 따라 거의 매일 표고버섯사에 가 버섯을 딴 아이들은 봄을 맞아 텃밭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는 일도 놀이처럼 재밌게 했다. 감자, 옥수수, 상추, 오이, 가지, 토마토, 양배추, 브로콜리 등등 아이들은 외할머니와 함께 텃밭을 풍성하게 수놓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밭일은 두 배 세 배로 손이 더 들지만 씨를 뿌리며 조잘조잘 불러대는 동요소리는 그 어떤 노동요보다 기운이 난다. 외가에 머무는 시간이 한 달을 넘어가면서 벌써 싹이 올라오고 있어 아이들은 수시로 텃밭으로 달려가 싹이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며 어서 여름이 되어 맛있는 열매를 따먹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시에선 토끼에게 밥을 주기 위해, 텃밭체험을 하기 위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긴 줄을 서야하는데 여기선 아이들의 일상이다. 동물을 보호해야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골고루 밥을 먹어야 한다 등 시간을 내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제가 돌보는 가축들과 농작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건강한 생각을 키워갈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부재로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으셨던 외할머니는 손주들을 위해 외할아버지 몫까지 더 기운을 내셔서 뒤뜰 동물원과 앞뜰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한가롭게 꽃놀이는 못했던 봄이지만 정성으로 돌보고 키워야 하는 많은 것들과 함께 깊은 슬픔에서 다시 희망을 키우는 봄이다.   

외할아버지의 유산 뒤뜰 동물원.
 외할아버지의 유산 뒤뜰 동물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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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새끼 토끼와의 조우
 너는 누구냐? 새끼 토끼와의 조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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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은 토마토. 이젠 토마토도 먹을래요!
 내가 심은 토마토. 이젠 토마토도 먹을래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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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위기, 장난감을 사오다!

이렇게 자연 속의 외가에서 아이들은 장난감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제 다섯 살이니 돈에 대해서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까꿍이에게 만원을 주며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사 오게 했다. 얼마 후 까꿍이는 의기양양하게 제가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을 양손에 들고 돌아왔다.

간식거리를 예상했는데, 결과는 자동차 장난감 두 대였다. 까꿍이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다 동생 산들이와 싸움을 피하기 위해 똑같은 자동차 두 대를 사왔기에 그냥 넘어갔다. 장난감 없어도 외가엔 재밌는 게 많아 좋다더니 장난감 생각이 났었나 보다. 몇 주 만에 보는 장난감에 두 아이는 그날 저녁 신나게 자동차 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또 마트에 따라간 까꿍이가 더 비싼 보석함 장난감을 두 개 사온 게 아닌가. 새 장난감이 생기자 자동차 장난감은 밀려났고, 보석함도 처음 몇 시간 반짝 갖고 놀곤 집안 곳곳으로 흩어져버렸다.

역시 자연 속에선 인공 장난감은 없어도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굳어질 때 읍내에 새로 생긴 파스타 집엘 갔다. 그곳엔 미끄럽틀부터 지붕차, 씽크대 등등의 장난감이 가득한 놀이방이 있었다. 오랜만에 놀이방을 만난 두 녀석은 밥도 먹지 않고 두 시간을 놀았다. 그리고 성당 유아실의 블록 장난감과 강변 공원의 미끄럼틀과 시소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꼬마일꾼들... 밥값은 해야죠!
 꼬마일꾼들... 밥값은 해야죠!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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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아도 가끔씩은 인공 장난감과 놀이터가 생각나는 아이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외가에서 유년을 보낸 도 그 시절 미끄럼틀이 있는 도시의 놀이터 가는 게, 예쁜 미미 인형과 소꼽놀이세트를 갖는 게 소원이었다. 자연 속에서 꾸는 아이들의 꿈도 필요하고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꾸는 꿈도 필요하다 싶은 게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인 '장난감 없이 살기' 미션. 성공적인 면은 아이들이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자연이 아이들의 놀거리가 되다보니 늘 이름을 써달라며 니 것 내 것을 가르던 싸움이 줄어들었다. 장난감만 던져주곤 집안일 하기에 급급했던 난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어릴 적 내가 하고 놀았던 놀이를 기억해 함께 놀았다.

광고 속 현란한 장난감을 사주는 것보다 잠깐이어도 친구가 되어 놀아줘야 아이들이 행복해 한다는 걸 가슴으로 느끼는 중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아직 어린 복댕이를 업고 아이들과 노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놀이공원 기차보다 더 재밌어! 엄마 아빠는 힘들어!
 놀이공원 기차보다 더 재밌어! 엄마 아빠는 힘들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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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장난감 없이 살기는 그 어디보다 자연이 풍요로운, 외할아버지의 유산이 보물찾기처럼 곳곳에 박혀있는 산청의 외가였기에 가능했다. 봄의 끝자락에 도시의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장난감 속에 파묻혀 일상을 보내야 할 것이다. 도시의 공원을 찾아 나들이를 갈 수 있겠지만 여기 만한 놀거리는 찾기 힘들 것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아이들에게 자연은 가끔 여행을 통해 겪게 해주면 된다던 남편도 이젠 아이들은 자연에서 키우는 게 좋다고 한다. 마음은 장난감 상자를 버리고 자연 속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해결해야할 도시의 밥벌이 숙제가 아직 많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을 보러 내려온 아빠에게 까꿍이는 더 많이많이 자고 서울 집에 갈 거라며 외할머니의 품을 파고든다. 친정 엄마 혼자 남겨두고 갈 일보다 외가를 떠나 도시로 가야할 아이들이 더 걱정된다. 그래도 아이들은 꽃피는 봄 동안 외가에서 온몸으로 껴안은 자연을 도시에서도 찾아내리라 믿는다.

다음 미션은 도시로 돌아가 외가에서도 끊지 못했던 텔레비전 없이 살아보기다. 외할머니라는 지원군 없이 나홀로 육아에서 과연 성공할지 의문이다. 그래도 일단 도전! 

고마운 친구, 자연!
▲ 초록 그늘 고마운 친구, 자연!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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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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