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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 얘기야. 처자식이 딸리면 치사한 것도 견디고 필요에 따라 이념도 바꿔야지. 오늘의 아버지들, 예전에 비해 그 권세는 다 날아갔는데 그 의무는 하나도 덜어지지 않았거든. 어느 날 애비가 부당한 걸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박차고 나와 낚시질이나 하고 있어 봐. 이해하고 사랑할 자식들이 얼마나 있겠어? 강남권 초등학교에선 애들이 모여 앉아 제 애비가 죽으면 무엇 무엇을 물려받을지 셈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어. 효도가 비즈니스가 된 세상이야. 그러니 어떤 애비가 배롱나무처럼 살 수 있겠느냐고. - <소금>에서

<소금>(한겨레출판 펴냄)은 올해로 문단 데뷔 40년째라는 작가 박범신의 40번째 책이다. 최근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것을 묶은 것으로, '아버지'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이다.

<소금>표지
 <소금>표지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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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화자인 난 어느 날 평매 마을 인근 한 폐교의 배롱나무 아래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10년 전 어느 날 그것도 성년이 된 생일 날, 집 앞까지 왔다가 오던 길을 되돌아가 종적 없이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찾아서 아버지가 다녔다는 초등학교를 찾아온 시우였다.

시우의 아버지 선명우는 가족에게 있으나마나 한 그런 존재감 없는 가장이다. 그가 가족에게 필요한 이유는 월급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가파른 속도로 늘어만 가는 아내와 세 딸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월급통장 뿐이었다.

사실 그가 가족에게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도, 어떤 잘못을 해서도 아니었다. 결근은커녕 단 한 번의 지각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퇴근 후에도 가족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묵묵히 할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숙맥'이란 말이 있다. 콩과 보리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콩과 보리조차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수룩하고 멍청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는.

경제권과 집안의 대소사 결정권을 거머쥔, 어떤 일도 남편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기 일쑤인 그의 아내는 어지간히 화날 일에도 묵묵한 그를 늘 '숙맥'이라 불렀다. 딸들 역시 "쑥 아빠!"라 부르는 등으로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무시하곤 했다.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여전히 어디선가 그렇게 걷고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날엔 낯선 산협 사이로 난 외줄기 벼랑 끝을, 또 어떤 날엔 가뭇없는 허공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꿈을 꾸기도 했다. 아버지 없는 자리는 나날이 놀랄 만큼 확장되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쳐 무의식 속으로 침전되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하루가 다르게 복원되는 속도도 놀라웠다. 아버지는 수많은 해석의 길을 거느린 놀라운 텍스트였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 뒤늦게 알았다. - <소금>에서

그런데 이런 아버지가 사라진 직후 이 가족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가장 먼저 부서져 버린 것은 음료회사의 상무인 아버지 못지않게 경제력을 갖춘데다가 평소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아버지를 앞장서서 무시하곤 하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함께 시우 자매들은 물고 뜯는 사이가 되고 만다.

그나마 아버지를 가장 많이 연민했으며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 딸 시우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동시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많은 부분과 아버지 이전의 한 사람인 선명우를 보게 된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대략적인 배경인 3분의 1정도. 이후 가족에게 그토록 성실했음에도 존재감이 없었던 가출한 시우의 아버지인 선명우와 아버지의 희생으로 성장했지만 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은 30대 후반의 시인인 내가 화자가 되어 지난날을 훑는다.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죽은 그는  한반도에 살림터를 잡고 사는 7천 명이 넘는 사람 중 어디에 어떻게 세워놔도 전혀 표가 나지 않을 한 사람의 중년 남자에 불과했다. 그냥 염부1이라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다.

"햇빛이 죽인 거지. 소금이 죽인 거지! 그래도 모르겠어요? 소금 만드는 양반들이 참 뭘 모르네. 안 먹고 땀만 흘리면 몸 속의 소금기가 속속 빠져 달아나요. 이 양반, 몸 속 염분이 부족해 실신해 쓰러졌던 거예요. 만들기만 하면 뭐해요. 자기 몸 속의 소금은 챙기지도 못하면서!" - <소금> 프롤로그 '햇빛살인'에서

가망성이 있어 보이는 자식 하나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은 물론 어린 동생들까지 처참하게 희생하는 아버지,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배부르게 먹이고자 월남전에 갔으나 절름거리며 돌아온 아버지, 중동의 사막 바람과 싸워야만 했던 아버지,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시는 젊음들을 위해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늙은 아버지들, 가장 낮은 곳으로 내처지고도 자식들을 위해 자존심마저 버려야 하는 아버지, 추억과 꿈을 묻고 돈을 버는 기계로 살아가는 아버지 등 여러 유형의 아버지들과 그 아버지의 가족들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소금>을 통해 만나는 아버지들은 이제까지 우리들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그런 평범한 아버지들이다. 혹은 내 남편의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들 이야기다. 아버지 이야길 하면서 왜 하필 '소금'일까. 오늘날 설탕과 함께 '멀리해야 할 존재가 되어버린 소금'. 하지만,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질이다. 몸속에 일정량(0.85~0.9%)이 채워져 있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태로울(0.2%이면 사망) 정도로. 그 때문에 지금처럼 소금이 흔하지 않던 옛날에는 소금 때문에 크고 작은 전쟁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작가는 건강을 해치는 해로운 존재로만 더욱 부각되는 소금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을 새삼 바라보게 하고 그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소금>은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취할 수 있는 소설 문법에서 비켜나 있다. 화해가 아니라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소금>이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가 그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근원적인 화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대를 걸어온 '아버지1', '아버지2', 혹은 '아버지10'의 이야기다. 늙어가는 '아버지'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붙박이 유랑인'이었던 자신의 지난 삶에 자조의 심정을 가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묻고 싶다. 이 거대한 소비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 <소금> '작가의 말' 줄에서

종종 "내 삶에 가장 큰 축복"이라고 자랑할 만큼 자식에게 사랑과 헌신을 다하셨으며 정서와 낭만이 풍부한 아버지의 딸인 때문에 지난날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아버지 이야길 참 많이 들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내 아버지를 부러워하며 그와는 반대인 자기 아버지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런 아버지와 아직 화해하지 못해 남아있는 '앙금'이었다. 미움과 원망과 그리움이 엉킨.

이 책 <소금>이 아버지를 어떻게든 바라보게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소금은 만물을 살린다고 그는 말했다. 소금이 인체에 무조건 해롭다는 건 정제염 때문에 생긴 비과학적 오해라는 것이었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 80퍼센트가 마그네슘 결핍증을 갖고 있다는 통계를 본 적 있는데, 질 좋은 천연 토판염(기자주: 염전에 황토를 다져 깔아 얻는 우리 전통방식의 소금)을 섭취하면 다 해결될 문제야. 우리 천일염은 마그네슘 함량이 프랑스 게랑드 소금보다 서너 배 이상 들어있어. 칼륨이나 칼슘 성분도 월등해. 게다가 토판염에 함유된 다량의 미네랄은 인체의 밸런스를 바로잡아 주네. 혈압엔 소금이 나쁘다고 하지만, 좋은 토판염에 함유된 마그네슘, 칼륨 등이 나트륨의 배설을 촉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혈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어" 토판염 예찬에 이르면 밤을 꼬박 새워도 할 말이 남아 있다는 투였다 - <소금>에서

'소금'을 통해 만나는 아버지 이야기도 의미있었지만, 소금과 염전에 대한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어서 또한 좋았다. 그리고 '앙똥했던', '해낙낙해낙낙', '성마른', '어썩어썩', '살똥스런', '가살스런', '푼푼한', '담쏙', '범박하다', '엉너리' 등 내가 평소에 잘 쓰지 않아 낯설지만, 살려 쓰고픈 우리말들과의 만남 또한 즐거웠던 그런 책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소금>| 박범신 (지은이) | 한겨레출판 | 2013-04-15 | 정가:13000원



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한겨레출판(2013)


태그:#소금, #아버지, #장편소설, #박범신, #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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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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