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서낭당 길에 ...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연분홍 치마는 마치 우리 강산의 처녀들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바람처럼 하늘거린다. 이 노래 가사에는 인공의 기계어가 없다. 모두 우리가 50년대 60년대에 농경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자연적인 것들이다. 봄바람, 산제비, 성황당길, 꽃, 별, 풀잎 등 모두가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수한 우리말 들이다.
이 노래에는 현대인의 경쟁, 삶의 각박함, 이별의 아픔, 사랑의 슬픔 등의 느낌도 없다. 이 노래에는 그냥 열아홉 처녀의 부끄러움과 봄의 꽃과 꽃이 시들어 가며 봄이 감을 아쉬워하는 아름다운 서정의 노래이다. 곡과 가사가 모두 예쁠 뿐이다.
이 노래는 내가 태어나던 해, 1953년에 나왔으니 내 나이하고 같다. 유행가라 하지만 좋은 노래는 세월을 뛰어넘어 불린다. 지금도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란다. 그리고 이 노래를 처음 백설희씨가 불렀지만, 그동안 12명의 가수가 다시 불렀다. 그만큼 우리 국민이 봄이 면 가장 좋아하는 국민 봄노래라는 것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연분홍 치마를 입은 19살의 처녀다. 꽃잎만 떨어져도 부끄러워 볼이 빨개지며 옷고름 씹어 가는 소녀, 소녀는 마을에 친구도 없다. 다만 꽃, 별, 자연만이 친구다. 서낭당 가는 길에 피어있는 꽃들, 꽃이 피면 즐겁고 꽃이 지면 슬프다. 별이 뜨면 즐겁고 별이 지면 슬프다. 새가 울면 따라 웃고 새소리가 슬퍼지면 따라 울기도 하는 자연만이 친구다. 서쪽 하늘에 저녁놀이 물들기만 해도 왠지 슬퍼지더라. 그런데 그 좋았던 봄날도 가려 하고 있다. 열아홉 처녀는 그 봄이 가버림이 너무 아쉽다.
사진첩에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나의 어린 시절, 50년대 중반에 어머니와 어머니가 동생을 안고 내 손을 잡고 찍은 사진 한 장이다. 지금의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신다. 그러나 사진 속의 어머니는 20대 초반의 젊은 새각시다. 그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도 저리 젊은 때가 있었는 갑다'하면서 감탄한다.
어머니는 치마에 저고리를 입고 계신다. 흑백사진이라 색은 모르지만 어머니의 치마가 연분홍치마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노래를 들으면은 이제 나이 들어 치매를 앓고 계시는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노래의 주인공은 울 어머니의 처녀시절을 연상케 한다. 12살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큰 과수원집에서 외할아버지와 계모 밑에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처녀시절을 보냈다는 어머니, 그때 어머니의 친구가 이런 자연의 것들이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과수원에는 연분홍 치마처럼 봄이면 진달래가 붉게 물들었고 과수원 옆의 오솔길에 서낭당이 있었다. 그 서낭당 가는 오솔길에는 뻐꾸기가 울었었다.
'봄날은 간다' 이 노래는 또한 나를 어린 시절로 이끌어간다. 사진 속의 그 시절, 우리는 시골의 외가 옆의 마을에 살았었다. 마을에 몇 호 살지 않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3살 터울의 내 밑에 동생이 막 태어나서 어머니가 안고 있을 때이니 내 나이가 4~5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마을에는 내 또래의 친구도 없었다. 나또한 그때는 자연과 친구였다. 들길이나 냇가에서 나 혼자 물고기, 개구리를 벗 삼아 놀았던 기억 밖에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유일한 일은 어머니를 따라 그 당시의 면소재지의 장날에 가는 것이었다. 장에 가면 약을 파는 약장수 공연이 있었다. 약장수들은 판소리, 마당놀이를 하며 중간 중간에 약을 선전하며 팔았었다. 그 사람들은 공연이 한 참 재밌을 대목에 가서 꼭 멈추고 약을 팔았었다. 시골 사람들은 그 재밌는 대목을 볼 요량으로 가지 않고 약을 사 주었다. 그리고 닭 전에 가면 개, 닭, 토끼들을 볼 수 있었다. 자전거의 뒤에 달린 우리에 갇힌 짐승들은 이장 저장 끌려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나는 짐승들을 깨우려고 돌을 우리에 던져 넣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다. 약장수공연과 닭 전이 당시 내가 장날이면 어머니를 따라가서 보는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들이었다.
어느 봄날, 장이 끝나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산에는 진달래, 철쭉이 붉게 물들었었다. 오솔길을 걸어오다 동네 어귀의 어느 집에 들렀었다. 그 집에는 서울에서 놀러 왔다는 친척 아저씨의 축음기가 있었다. 검은 기계 위에 검은 판을 올려놓으면 판이 빙글빙글 천천히 돌고 그 판 위에 바늘이 있는 막대를 올려놓으니 여자 목소리의 가늘고 떨리는 노래가 나왔었다.
아마 55년이 흘렀지만, 그때 나온 노래 중에 하나가 백설희씨의 '봄날은 간다'였다. 나는 그렇게 '봄날은 간다'와 만났었다. 자연만을 보고 자랐던 촌놈이 맨 처음 축음기를 보고 신기해하던 일이라서 지금까지 생생하다.
이제 사진첩의 젊은 어머니도 80이 훌쩍 넘어 노환으로 요양병원에 계신다. 나 또한 60의 노인 대열에 들어섰다. 내 인생의 봄날은 이미 가버렸는지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19살 처녀가 봄이 가버림이 슬퍼지듯이 인생의 봄날이 가고 있음이 슬플 뿐이다. '모란이 지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라고 노래한 김영랑은 오직 봄만을 사랑한 시인 인 듯싶다. 꽃이 지는 5월의 봄이 모란이 져버림과 함께 다른 계절은 기대할 것도 없다는 듯이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라고 노래했다.
봄날은 간다. 그러나 다른 계절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을, 겨울이면 어떠랴. 황혼녘이라 해도 이제는 슬퍼하지 않으리다. 그 계절 나름대로 즐기며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듯이 유유히 세월 따라 나이 들어가며 다가오는 황혼의 삶을 즐겁게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