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럿 워크 운동(Slut Walk Movement)'을 아는가. <공간주권으로의 초대> 제4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2011년 1월,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 대학에서 '안전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생귀네티라는 경찰관이 "(성폭행)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여자들은 슬럿(성매매 여성이나 행실이 헤픈 여자를 속어체로 이르는 말)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많은 캐나다 여성이 분개했다.
그런데 그 다음달에 로버트 듀어라는 이름의 판사가 성폭행 피고자에게 벌금형을 선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피해자의 옷차림이 피고에게 잘못된 인상을 줬고, 피고의 잘못은 단지 여성이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추잡한 성(性)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못말리는 사내가 언제 캐나다에 가서 사법 시험을 치렀나 보다. 세계 마초들은 어쩌면 이리도 하는 말들이 똑같을까. 결국 이들의 말을 전해 들은 캐나다 여성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 해 4월 3일, 3000명의 토론토 여성들은 슬럿처럼 차려 입고 시내 중심가를 행진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내 몸이고 내 맘이야!"라고 외쳤다. 그 외침을 통해 그들은 "슬럿처럼 입을 권리"를 포함하여 '자기결정권'을 강조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기결정권' 외에 다른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다. 이 책의 주요 화두어이기도 한 '공간 주권(space sovereignty)'이 바로 그것이다.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안숙영 계명대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밤길 되찾기 운동'이나 '잡년 행진' 등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움직임도 이와 관련된다. 이들 움직임은 공적 공간의 주인은 남성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여성을 공적 공간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 곧 '공적인 공간 부수기'를 위한 운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9명이 '공간'과 '주권'에 대해 토론한 책이 책은, 아홉 명의 공동 연구자가 모여 '공간'과 '주권'의 만남을 위한 토론을 하고 그 결과물을 엮은 것이다. 공간이나 장소는 단순히 객관적인 물리적 실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와 '단독주택', 또는 '전세'와 '월세'라는 말들이 환기하는 다양한 사회적 이미지들을 연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가 '텅 빈 환경'으로서의 어떤 '객관적 공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 북적대고 부대끼는 어떤 장소, 즉 어떤 관계적 공간에 위치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중략) 공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 5쪽, '책을 펴내며'에서저자들은 공간이 사회적 강자의 관점에서 배치되고 작동된다고 본다. 이에 따라 공간에 대한 접근에서 위계와 차별이 발생하고, 소수자는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공간이 주권이나 인권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는 평범한 여성이 밤길이나 골목길을 얼마나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재는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각종 끔찍한 성범죄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은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젊은 여성들의 이른바 '야한' 옷차림은 유전자 정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선택의 하나라는 게 과학적 연구 결과다. 여성들의 '야함'은 그들 개개 여성의 의도와는 무관한, 좀 더 본질적인 본능의 영역에서 분석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야한' 옷차림을 성폭행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범죄적 행각을 정당화한다.
정부 당국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런저런 안전 대책을 세우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게 영 미덥지가 않다. 오히려 짜증이 난다. 성폭행범에게 다는 전자 발찌는 무엇이며, 그들의 신상 공개 방침은 우리가 뭘 어찌하라는 메시지인가. 전자 발찌를 떼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성폭행범이 겁나면 너희들이 잘 알아보고 먼저 피하라? 여성이 밤길을 두려워하고, 동네의 익숙한 골목길을 눈치를 봐가며 걷지 않으면 안 되는 대한민국에서 공간 주권의 문제는 시시각각 펼쳐지는 생존의 문제,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와 연결된다.
공적 공간은 좋고, 사적 공간은 나쁘다?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4장에 나오는, 젠더(gender)에 따른 공간 분리의 개념으로 좀 더 알아보자. 공간 분리의 개념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철저하게 대립적인 공간 관계에 놓인다. 곧 남성은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공적 공간을 차지하고, 여성은 가정으로 대표되는 사적 공간을 차지한다. '공적 남성', '사적 여성'이라는 이원적 대립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공간 분리는 매우 공고하다. 그래서 남성의 공적 공간과 여성의 사적 공간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첨예하게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는 게 안 교수의 주장이다. 곧 공적 공간은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지만, 사적 공간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가 공적 공간은 여성이 진입해야 할 '이상적 공간'으로, 사적 공간은 탈출해야 할 '억압적 공간'으로 간주된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는 언론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여풍강세', '여풍당당', '첫 여성 장관', '알파 걸', '골드미스' 같은 용어에서 공적 공간의 이상화를 읽어낸다. 그의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2011년 현재 15만6000여 명에 달하는 남성 전업주부는 사회적으로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는 이것을, 여성의 남성화는 바람직하지만 남성의 여성화는 그렇지 않음을 시사하는 단서로 이해한다.
한마디로 공적 공간은 좋고, 사적 공간은 나쁘다! 이 때문에 저자는 공적 공간이나 사적 공간과 같은 추상적인 공간 개념 상의 이분법을 깨뜨리는 일이 매우 중요한 사실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할 때라야 여성과 남성이 일터와 가정에서 그야말로 평등하게 해야 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트라우마의 공간 = 고통 받은 당사자의 입장 담은 공간제4장과 더불어 인상 깊게 다가온 대목은 '기억의 공간, 트라우마의 공간, 희망의 공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제5장이다. 우리는 '공간'의 무엇을 기억할까. 그 '무엇'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서 선택될까. 바로 '그 공간'의 '무엇'을 기억하는 일이 과연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광화문이나 경복궁을 일본인이 훼손한 우리 민족의 '성지(聖地)'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제5장의 필자인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에 따르면, 이 생각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이유가 있다. 그곳은 일제가 접수하기 전부터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 심지어 그곳은 인근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파괴는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되었고, 일제는 그 파괴를 완성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공간을 기억한다는 것에는 바로 이런 문제가 있다. 그 기억이 문제가 되는 공간의 확고한 정체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상이한 공간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필자가 기억의 공간에 권력이 개입한다고 보는 이유다. 필자는 박정희 정권이 세운 4·19 국립 묘지가 국립현충원과 별다른 차이가 없이 세워진 것을 안타까워한다. 국가가 죽인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아이러니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의 공간에 대한 대안으로 필자가 제시하는 것이 트라우마의 공간이다. 필자는 트라우마의 공간을 고통 받은 당사자의 입장을 담은 공간으로 정의한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필자에 따르면, 이들 기념관은 5·18 국립 묘지와 같이 희생자를 영웅으로 미화하는 대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보다 진전된 인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들 트라우마의 공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역사적 비극이나 참상이 일어난 장소를 그대로 보존해 후대의 반성과 교훈을 일깨워주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 번성하면서 많은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관광지 차원으로 전락하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눈물도 상업적 이윤을 남긴다는 필자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시설이 자칫 개개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에 치우침으로써 역사적 맥락을 벗어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가 서구사회에서 갖는 가장 큰 역할은 역사에 대한 반성이나 인권의식의 증진보다는 오히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는 그릇된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이 조장되고 있다.' - 134쪽공간을 놓고 벌이는 싸움은 우리 모두의 것공간은 추상이자 실제다. 나는 그 공간의 추상성과 실제성을 미묘하게 뒤섞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공간'이라는 명사구를 보라.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어떤 '장소'를 말하는 동시에 우리가 기억 속에 쌓아가는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 되었건 공간, 특히 삶의 공간은 우리의 실존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재산권이든, 인권으로서의 주거권이든, 또는 도시 그 자체에 대한 권리든 우리가 그 무엇을 활용해서라도 그 삶의 공간에서 함부로 쫓겨나지 않도록 싸워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보라. 우리에게는 멀리로는 1980년대의 서울 상계동, 목동, 사당동 등의 수많은 달동네들과, 가까이로는 2007년의 평택 대추리와 2009년의 서울 용산 4구역, 2012년의 제주 강정 마을, 그리고 밀양 보라마을들이 있다. 모두 삶의 공간을 놓고 '절대적인' 공간 주권자로서의 인민이 국가 권력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벌이고 있는) 곳들이다.
그 치열한 싸움 끝에 국가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 대신 갈수록 공간 사유화의 광풍이 거세지는 이 시대에, 자신들이 살던 집과 땅에서 강제로 퇴거당하는 사람들만 늘어날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그 수는 100만 명 가까이나 된다고 한다. 공간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인 까닭이다.
<공간주권으로의 초대> (SSK 공간주권 연구팀 엮음, 강현수 외 8명 지음 | 한울 | 2013. 4. | 228쪽 | 2만 원)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