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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빠는 막둥이만 좋아해요."
"막둥이는 막둥이잖아."

"그래도 막둥이는 항상 함께 손잡고 자잖아요."
"너도 아빠 손잡고 자고 싶어?"
"그건 아니에요."

큰 아이(중3), 둘째(중2)는 자주 막둥이만 아빠가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편애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막둥이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다 되었는 데 막둥이만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아직도 잠잘 때 손을 잡고 잡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다른 집 아빠도 막둥이를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둥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7형제 중 막내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형들이 막내가 불쌍해서라도 잘 해줘야 하는 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생 고생에 수모까지 당했습니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먼저 보내셨던 아버지. 이제 자신도 14년 전 흙으로 돌아가셨다.
 아내를 두 번이나 먼저 보내셨던 아버지. 이제 자신도 14년 전 흙으로 돌아가셨다.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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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형들에게 받는 수모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결혼사는 '기구함' 그 자체였습니다. 두 번이나 상처를 하는 바람에 결혼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남자들 중 상처를 두 번 하는 이는 얼마 없을 것입니다. 함께 했던 아내를 두 번이나 먼저 보내면서 아버지가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간 아내가 남겨둔 아이들이 다섯이었는데 그 중 하나도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도 많은 아픔을 간직하신 분입니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아버지를 볼 때는 함께 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눈물, 콧물 흘리는 아이 넷을 보고 도저히 돌아설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부모님과 형님들 사랑도 받지 못하고 아내마저 두 번이나 먼저 보낸 탓인지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집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아니 능력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삶을 긍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장부'라 할 정도로 강했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정을 이룩하기 위해 더 큰 일을 하자고 하면 아버지는 항상 "그냥 이대로 좋다"였습니다.

"올해는 논 좀 더 사야 않겠습니꺼."
"고마 이 정도만 안 되나. 누가 다 할끼고."
"아이들이 9명이나 됩니더. 공부도 시켜야 안 합니꺼"

"입에 풀칠만 하면 된다 아이가."
"참내 입에 풀칠 하는게 아니라. 아이들은 우리처럼 살면 안 됩니더."

이럴 적 이렇게 다투는 부모님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게으른 분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몸'으로는 열심이었지만, 머리를 통해 땅을 늘리고,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지혜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우리집 가장은 어머니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하시는 일에 끝까지 반대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번씩 당신이 살아온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내가 볼 때도 참 기구하게 사셨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동네가 바닷가입니다. 제가 4살 때쯤 다시 홀아비가 될 뻔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러주시는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동수야!"
"예."
"니 아나. 내가 네 큰 어머니 두 분을 먼저 보낸거를."

"그럼요."
"참 내 팔자도 기구하다."

"..."
"그런데 내가 네 옴마(엄마)도 먼저 보낼 뻔한 것도 아나."
"예?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하모. 네가 4살인가 5살때다. 네 옴마가 동네 사람들하고 개가(바다)에 반지락(바지락), 꼬막, 백합 같은 것 잡으로 갔다가 배가 뒤집어 졌다가 아이가. 나는 그 때 네 옴마가 죽은 줄 알았다."
"...."
"동네 사람들이 네 옴마가 탄 배가 뒤집어졌다고 난리가 안 났나. 나는 정신이 빠져 버렸다. 선창에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배가 뒤집어 졌는데 엄마는 어떻게 살아났어요?"

"응. 나중에 알고보니 네 옴마는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가지고, 걸어서 나왔다 아이가. 그래서 살았다. 하나님이 도우신거라."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삶을 참 기구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세번째 맞아 백년해로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삶을 참 기구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세번째 맞아 백년해로 하셨습니다.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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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당신은 바다로 나갈 때는 배를 탔는데 물 때가 되어 뭍으로 나오려고 할 때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걸어 나오셨다고 합니다. 바람도 많이 불었습니다. 결국 그 배는 선창 앞에서 뒤집어 졌고, 8명이 숨졌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사고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세 번 상처를 할 뻔한 자신을 지켜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다는 것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가장으로서는 부족했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매를 들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습니다. 자상한 분은 아니었지만, 그 어느 아버지보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가 매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옛날 아버지가 다 그렇듯이 아버지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87년 5월 군입대를 하는 제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일본식민지때 징용 끌려갔다 오셨기 때문에 군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칼바람 맞으며 부둣가에서 짐을 날랐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일본 극우가 침략을 정당화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요즘 군대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걱정 마세요. 건강하게 다녀올게요."
"고참들이 때려도 참아야 한다."

"요즘 누가 때려요."
"하모 때리는 고참이 있겠나."
"건강하게 잘 다녀와야 한다. 무조건 건강해라. 알겠나."
"예, 아버지도 건강하세요."

"내는 걱정 말고."

아버지는 버스를 타고 떠나는 아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버지의 눈물, 한 사내는 진한 눈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때 아버지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 11년을 더 사셨습니다. 1997년 3월 암진단을 받고, 98년 4월 하나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해 1월 대학원을 졸업할 때 수원까지 직접 오셨습니다. 육신을 놓을 때가 다 되셨는 데도 아들이 목사가 된다는 생각에 한 달음에 달려오신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용돈 좀 주세요."
"용돈?"
"네. 아버지께 용돈 받고 싶어요."

"보자. 그래 3만원밖에 없다. 이거라도 줄까?"
"그럼요. 3만원이 어딘데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다음에 30만원으로 갚아 드릴게요. 건강하세요."
"아이다. 30만원으로 안 갚아도 된다. 너희만 건강해라. 나는 너희들이 건강하면 된다."


결혼 한 아들이 아버지께 용돈을 드린 것이 아니라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기쁜 얼굴을 하시면서 주셨습니다. 3만원은 아주 적은 돈이지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석 달 후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암 말기는 진통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약 일주일만 고통 가운데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그리고 먼저 보낸 두 아내에게 곁으로 가셨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평화롭게 살고 계십니다.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아버지 응모



태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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