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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과 잘 소통한다고 그 국가를 민주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을까?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사회교양특강'에서 특정 체제가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정당'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다양한 가치를 대표하는 여러 정당이 경합하는 유럽의 민주주의가 다른 것처럼, 정당 개수와 이념의 스펙트럼에 따라 민주주의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박 대표는 "진보정당들도 집권할 수 있는 나라, 노동조합이 강한 나라가 이상적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짧으면서도 무역흑자국인 독일을 예로 들며, 노동자의 시민권이 커질수록 노동을 둘러싼 갈등이 줄어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유럽은 사랑하는 것도 달라요. 미국은 결혼할 때 학자금, 모기지 등을 갚을 능력을 안 볼 수 없어요. 공공보험이 잘 돼 있는 것도 아니고 취업을 해야 보험을 들 수 있으니까. 유럽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확률이 높아요. 여자들은 배우자 소득을 따지는 게 아니라 유머 있고, 친절하고, 요리도 잘하는 남자를 만나죠. 사랑도 민주주의와 관련 있어요."

 박상훈 대표는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당"이라고 말했다.
박상훈 대표는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당"이라고 말했다. ⓒ 손지은

현대 민주주의의 과제, 관료제와 경제권력

박 대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다르다"고 했다. 고대 민주주의는 시민이 돌아가며 통치자 역할을 맡는 사회구조였기에 계급문제가 없었고, 정당도 필요하지 않았다.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도 많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표현대로 '잘 통치하는 것과 잘 통치받는 것'이 순환하는 구조가 고대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영토가 커지고 시민이 늘어나면서, 통치자가 곧 피치자가 되는 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됐다.

"통치자와 피치자가 나뉘면서 독립된 주체인 '국가'가 등장합니다. '시민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상은 고대 민주주의와 같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맥락은 달라진 겁니다."

국가는 체제 유지를 위해 거대한 물적 자원을 통제하며 시민에게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데, 그 주체는 관료다. 이들은 재정, 군사, 법률을 전문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돈과 물리력을 독점하는 집단이 됐다. 현대 민주주의 문제는 이런 구조 속에서 시작됐다. 거대권력으로 성장한 '관료제'가 시민들의 주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는 "강력한 국가 관료제 체제 속에서 시민의 권리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가 주목한 또 다른 과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만들어진 '계급' 문제다. 그는 미국 '월마트' 사례를 들며 거대한 경제권력의 출현이 민주주의라는 평등한 정치체제를 변형시킬 가능성을 경계했다.

"지금껏 경제권력이 이렇게 컸던 적이 없었어요. 미국 월마트라는 유통자본의 가족 소유 재산이 미국 전체 노동자 재산의 20%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중국은 상위 1%가 전체 부의 40%를 차지한다는 얘기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런 양상이 점차 심화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경제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힘이 민주주의보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 현대국가예요."

 중국 상위 1%의 부는 전체 부의 41%를 차지한다.
중국 상위 1%의 부는 전체 부의 41%를 차지한다. ⓒ SBS <최후의 제국> 화면 갈무리

국가 관료제와 경제권력은 현대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다. 그는 정치와 경제권력 주체들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견제를 이루는 방안으로 정당의 역할을 강조했다. 시민이 스스로 공동 이익을 요구하는 '집단'을 조직해 정당정부를 실현하고, 그들의 계층과 이념기반을 다져 더 균형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로부터' 만들어진 정당

19세기 말까지 정치 철학자와 지식인 대부분은 민주주의를 부정적 의미로 이해했다. 이를 '다수의 전제정치'나 '가난한 사람들의 선동정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 '민주주의는 신들에게나 어울리는 제도이지 인간에게는 맞지 않다'고 썼다. 당시 귀족들도 '부분이익(party)'을 대표한다는 이유로 정당(party)의 존재를 부정했다.

정당을 처음 만든 건 노동자들이었다. 19세기 영국 차티스트 운동을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노동자와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하라는 보통선거 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투표권을 획득한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뽑기 위해 대중정당을 만들었다. 대중들로부터 표를 얻어야 했던 귀족들도 정당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정치사회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현대 민주주의를 두고 '좌파로부터의 감염'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노동자 정당의 등장이 현대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의미죠. 프랑스 혁명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공화국(republic)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였어요. 그런데 혁명에 참여하는 하층민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이 정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기 시작했죠."

스웨덴을 바꾼 '사회민주당'

100년 전 스웨덴은 낮은 교육 수준과 과도한 음주 문화를 가진 탓에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과 협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배곯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위해 세금을 기꺼이 내는, 대표적인 복지국가가 됐다. 나라를 바꾼 것은 '사회민주당'이었다. 노동조합, 농민정당과 협력하며 집권한 사민당은 술 구입을 어렵게 하는 등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박 대표는 "정당들이 그 사회의 갈등구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대표했기에 스웨덴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당이 그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집권할 때 자신이 노동자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시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관에 따라 현실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당이 제 역할을 하면 국민이 정치인을 신뢰하고, 권위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스웨덴 보수당이 상속세 폐지 법안을 냈을 때, 국민들은 이를 수용했다. 공익을 위한 정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인 스스로도 특권의식이 없다. 실례로 스웨덴 국회의원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국회에 그들을 위한 전용 주자창도 찾아볼 수 없다. 박 대표는 한 여성 장관이 집안일이 바쁜 나머지 스타킹만 신고 출근해 사람들이 안쓰러워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하며, "정치가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해 안정된 사회를 이루면 권력적 요소는 많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개인 전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지하철로 출근하는 스웨덴 국회의장.
개인 전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지하철로 출근하는 스웨덴 국회의장. ⓒ SBS <리더의 조건> 화면 갈무리

"많은 사람들이 정치가 기득권이니 국회의원 수를 줄여서 권력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 하는데, 그러면 관료집단과 경제권력만 남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처지라고 생각해요. 스웨덴에서 정치가 사회를 바꿀 때 당원이 전체 시민 인구의 30%나 됐어요. 영국의 노동당 당원은 100만이 넘었고요. 공익을 위해서라면 당원이 많은 건 나쁘지 않아요."

박 대표는 정치가 갖고 있는 권력 요소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치 영역을 넓혀서 제 기능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민주주의 사회는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리고 정치로 구성된 구조에서 정당들이 넓게 사회를 대표하고, 강한 정당이 출현해 불평등한 경제권력과 국가권력을 완화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스스로 가치를 확장하면서 내부의 권위적 요소를 줄여가야 한다.

'박근혜 정부'보다 '새누리당 정부'가 돼야

"우리나라는 새누리당 정부라고 하지 않잖아요. '노무현 정부', '박근혜 정부'라고 하죠. 하지만 새누리당 정부라고 부를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진전된 거예요."

박 대표는 영국 노동당 정부나 스웨덴 사민당 정부처럼 우리도 대통령 '개인의 정부'가 아닌 '정당의 정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이 200년 전 정당 이름을 이어가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민주화 이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의 수만 110개가 넘는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정당이 이전 정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 이름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이 정부 운영에 책임지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이 정부가 되기 위해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 장관직도 관료가 아니라 정치적 책임성을 가진 '선출된 의원'이 맡아야 하며, 정당은 '섀도 캐비닛(그림자 내각)'을 구성해 정치인을 훈련시켜야 한다. 섀도 캐비닛은 영국 야당이 정권을 잡는 경우에 대비해 각 부 장관을 미리 구성하는 제도를 말한다. 정당에서 경제정책을 다루는 사람이 경제부처를 책임지는 방식이다. 박 대표는 "정치인이 유능한 관료들을 다룰 실력을 키우지 못하니 장관직을 관료 출신들이 차지하는 '회전문 인사'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지난 저축은행 사건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났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경제부처 일은 다 관료들이 했어요. 그러면 민주주의는 관료제의 외피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시민주권 원리를 실현할 수가 없게 되죠. 관료들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등에게 지배되기 때문에 선출된 대표들이 관료들을 통제해야 돼요."

노동은 진보만의 이슈가 아니다

 박상훈 대표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재발견>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살피고,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 정치의 발전방향을 제시한다.
박상훈 대표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재발견>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살피고,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 정치의 발전방향을 제시한다. ⓒ 후마니타스
"사람들은 노동을 마치 진보적인 이슈로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보수주의자도 노동 문제를 잘 다룹니다. 대표적인 게 독일이죠. 독일 하면 '노사 공동결정제도'나 '지역별 단체 협상 제도'를 생각하는데, 그게 다 보수정당인 기민당 때 시작한 거예요. 독일이 80년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많이 펴지 못한 건 기민당 노동자위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에요. 일본도 전후 자민당이 노동정책을 잘 다뤘어요. 이를 회사자본주의라 부르는데, 회사 안에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가 갖춰져 있죠."

노동문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바탕이 자본주의이니 급여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갈등을 빼면 사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노동 문제를 진보적이고 계급투쟁적인 사회운동 영역이라고 생각해 정당이 노사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박 대표는 노동 문제는 진보적 이슈가 아니라 보편적 이슈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몇 년 전 여름에 발생한 여의도 칼부림 사건의 범인도 비정규직 일자리만 전전하던 노동문제의 피해자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노동을 중시하지 않고, 하층에 대해서 모멸감을 가지는 반노동적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오바마는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우리는 경제의 힘을, 억만장자들이 몇 명이고 포춘지 500대 기업들의 이익이 얼마인지로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가진 누군가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는지, 손님에게 받은 팁으로 살아가는 웨이트리스가 일자리 잃을 걱정을 하지 않고도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낼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제를 만들려 한다'고 말했어요. 미국만해도 우리나라보다 나은 노동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동문제를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박 대표는 "수많은 갈등으로 쪼개져 있는 현대 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갈등을 몇 개의 중요한 이념이나 성격으로 응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당은 그렇게 응축한 갈등을 넓게 포용해야 한다. 정당의 이념 범위가 넓어지면 더 많은 갈등이 생길 것 같지만, 전후 일본 정당체제가 안정됐던 이유가 공산주의를 합법화했기 때문인 것처럼, 갈등을 다루려면 정당들이 사회를 넓게 대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상훈 대표의 강연을 듣고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
박상훈 대표의 강연을 듣고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 ⓒ 손지은

'숙제 하기 싫은 당'을 만들 수 있는 나라

민주주의도 인간이 만든 제도다 보니 쇠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리더와 새로운 정당이 등장해 변화를 추구하고, 여기에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몰락하지 않는다. 독일이 바로 그런 사례다. 문제가 나타나면 정당이 만들어진다. 녹색당과 해적당의 출현이 그랬다. 기민당과 사민당이 경직됐다고 느끼면 더 왼쪽이나 더 오른쪽이 출현한다. 박 대표는 "정치체제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민이 정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힘을 모으는 정당이 독일을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정치와 노동의 중요성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했다. 박대표는 민주주의 사회를 완성하는 것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달려 있다는 내용을 끝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얼마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 서점에 가서 저학년용 사회교육자료를 봤는데 그 책 내용 중 '숙제 하기 싫은 당' 만들기가 있었어요. 선생님들 편의 때문에 일률적으로 숙제를 내지 말고, 아이들이 개성과 자기주도성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하게 내 달라는 걸 요구하는 거예요. 문제가 있다면 정당을 만들라는 것이 학습의 요지입니다.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게 시민의 권리라는 걸 가르치는 거예요. 나중에 어른이 돼서, 퇴직했을 때 무엇인가 불리하다 생각되면 노인당을 만들고, 주부로 활동하는 데 보호받지 못한다면 주부당을 만들라는 겁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 위키트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상훈#민주주의#사회교양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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