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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며 살던 홍길동도 자신의 이름만큼은 홍길동이라 불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항일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이인섭은 이용연이라는 본명 대신 중국인 마적 두목이 마련해준 여권에 기재되어 있던 중국인 상인의 이름 이인섭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구한말 전후에 태어난 조선인, 애국지사들 삶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릅니다. 역사적 격랑기,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만난 난파선 같은 조국의 운명 자체가 이미 그 분들에게는 절박한 숙명을 예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항일운동가 이인섭의 자전적 회상기 <망명자의 수기>

외대 사학과에 재직 중인 변병률 교수가 엮어 도서출판 한울에서 펴낸 <망명자의 수기>는 이용연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놔두고 다른 사람 이름인 이인섭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항일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이인섭이 쓴 자전적 회상기입니다.

<망명자의 수기>┃지은이 이인섭┃엮은이 변병률┃펴낸곳 도서출판 한울┃2013년 5월 5일┃3만 8000원
 <망명자의 수기>┃지은이 이인섭┃엮은이 변병률┃펴낸곳 도서출판 한울┃2013년 5월 5일┃3만 8000원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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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섭은 1988년 9월 1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인섭의 아버지는 김관수 의병대에 가담한 일로 1907년, 이인섭이 19살 때 일본헌병대에 체포됩니다. 이인섭은 22살 되던 1910년부터 항일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합니다.

체포당하고 추출당하고 망명하기를 반복하다 25살 되던 1913년에는 감옥살이까지 하게 됩니다. 3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후 홍후즈 두목 왕더린의 도움으로 중국 여권을 받아 석방되는데 이 여권에 적힌 이름이 이인섭이었기에 이후 이용연은 이인섭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던 여느 애국지사의 삶처럼 이인섭의 삶 또한 기구한 조국의 운명만큼이나 쫓기고, 체포되고, 투옥되는 절박한 삶, 파란만장한 나날입니다. 그러던 1939년 여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유배중이던 이인섭은 소위 일본이 펼치는 '민족말살정책'을 듣게 됩니다.

아침 6시였다. 얼아지오-(무선전화)에서 국제소식을 듣던 필자는 "일본제국주의 당국에서는 조선민족들이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모다 일본말을 하게 하며 의복 신발 그타도 조선겄을 폐지하고 일본겄을 사용하며 심지어 성과 일흠도 모다 일본사람들 성명을 가지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망명자의 수기> 57쪽     

말과 글, 일상용품과 풍습, 성과 이름까지도 몽땅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민족성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침략국 일본 정책을 알게 된 이인섭은 이웃에 사는 최게립, 게봉우와 만납니다. 이들은 함께 한탄하고 함께 공분하며 언제 꽃피우게 될지도 모를 민족혼을 종자로 보전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대적 상황을 기록으로 담을 것을 결의합니다.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국이 해방되는 날 후손들에게 전해져 민족의 말과 글, 일상용품과 풍습, 성과 이름 등 민족혼을 꽃피우는 종자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기록된 것이 <망명자의 수기>입니다.

이인섭의 일생은 평안남도 평양과 맹산에서의 유년시절(1908~1922), 소비에트 사회주의건설 참여기(1923~1935), 정치적 유배기(1936~1956), 복권과 항일혁명역사 복원활동기(1957~1982)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힌민국, 애국지사들이 피와 땀으로 피운 꽃

이인섭이 자서전을 처음 쓰기 시작하였을 때는 제목을 <망국노의 수기>라고 하였었으나 1945년에 해방이 되고 독립이 되자 <망명자의 수기>로 바꾼 것입니다. 이인섭은 1982년 1월 5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애국장' 독립유공 서훈을 수여합니다.  

춤을 넘심넘실 추전 밤장사 아재시?! 그러코 그렅다. 그들이 모도다 우리의 전우였다. 얼이둥실한 낌에 님을 잃은 영월은 엊지할 주을 몰나서 갈팡질팡하다가 두 주먹을 밝은[불끈] 쥐고 욷리빨노 입술을 감물고 질서없이 펼처있는 원앙금침을 물그레미 보다가 백옥같은 힌 얼골이 홍색 모본단[비단의 하나] 리불에 더벅더벅 떠러젇다. 피섞인 눈물 떨어지는 곶마다 무궁화 송이가 뚤엳-뚤였이 피여 올은다.

무궁화가 피는 곳마다 님의 형용이 나타난다.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슬큰 흘니고 흘니고 나니 긔맥히고 답답하던 가심이 시원하고도 얼벌[어리벙벙]하여젇다. 벌떡 일어서던 영월에 앞을 체경[體鏡; 거울]에 끠였던 보국의 사진이 마지했다. 영월이는 억막주악에 섬섬옥수를 넌즛 들어서 보국의 사진을 얼는 들어 따뜯한 자긔 가슴에다 깊이깊이 간직하였다. 남들이 볼가바. - <망명자의 수기> 67쪽

이인섭 선생의 일생은 망명자의 설움이자 항일운동의 애국이었고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항일역사의 복원을 위한 고군분투의 삶이었습니다. 2008년 12월, 독립기념관 초청으로 국을 방문한 이인섭 선생님의 장남 이 아나톨리는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자 민족적 유물인 자서전, 전기류, 항일혁명사 관련 회상과 저술, 그리고 서신류 등 약 45건, 총 3459면에 달하는 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함으로 독립운동자료집 등으로 하나둘 결실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망명자의 수기>는 정말 고단하고 절망적이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시대적 상황, 이인섭을 중심으로 한 고난 극복의 활동상 담고 있지만 그 당시에 통용되던 한글 표기법등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어 우리말 시대변천사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 경제적 풍요, 문화적 자유 심지어 사회적 갈등까지도 절망의 시대를 견뎌준 애국지사들, 민족정신을 종자로라도 수호하려는 이인섭선생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누릴 수 있는 민족적 행복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됩니다.  

덧붙이는 글 | <망명자의 수기>┃지은이 이인섭┃엮은이 변병률┃펴낸곳 도서출판 한울┃2013년 5월 5일┃3만 8000원



망명자의 수기

이인섭 지음, 반병률 엮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13)


태그:#망명자의 수기, #이인섭, #변병률, #도서출판 한울,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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