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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던 맛있는 국이 있었습니다. 우거지가 든 국이었는데 고기도 아니고 두부도 아닌 묘하게 생긴 덩어리가 그 국에 들어있곤 했죠. 뭔지도 모르는 국이었지만 그것만 먹으면 저는 행복했습니다. 맛있었으니까요. 엄마가 이렇게 맛있는 국을 끓여주신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하지만 그 비밀은 곧 드러났습니다. 그 국은 엄마가 끓이신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엄마가 제게 같이 밖에 나가자고 합니다. 엄마의 손에는 큰 냄비가 들려있었죠. 둘이 간 곳은 바로 종종 맛있게 먹었던 그 국을 파는 식당이었습니다. 엄마가 주인 아줌마에게 냄비를 내밀자 아줌마는 미소를 지으시며 냄비 가득 국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따라 엄마와 주인 아줌마의 표정이 밝았다는 것, 그리고 아줌마가 냄비 가득 우거지가 든 국물을 담느라 국자가 여러 번 왔다갔다 했다는 건 생각납니다. 조그맣고 허름했던 집 앞에 계속 김을 내뿜고 있던 가마솥의 위엄(?)도 떠오르네요. 뭐니뭐니해도 그날은 그 궁금했던 국의 정체를 알아낸 날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 국의 이름이 바로 '해장국'이었습니다.

 보글보글 끓는 선지해장국
보글보글 끓는 선지해장국 ⓒ 임동현

어느덧 저는 그 해장국 속 덩어리가 소의 피로 만든 '선지'라는 것을 알게 됐고, 선지와 우거지를 넣고 끓인 국을 '선지해장국'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해장국 하면 술 한잔 마시고, 혹은 술 한잔 마시면서 먹는 국으로 인식되지만 제게 선지해장국은 엄마가 종종 큰 냄비에 담아오시던, 가족이 같이 먹던 맛있는 국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꼬마애가 멀국까지 다 비웠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저는 천식에 걸렸습니다. 그 때문에 이틀 동안 학교를 못 가고 집에만 있어야 했죠. 기침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엄마가 잠깐 밖에 같이 나가자며 제 손을 이끌었습니다. 데리고 간 곳은 동네에 있는 해장국집이었습니다.

점심 때가 지났는지, 점심 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식당 안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주인 아줌마와 다른 아줌마가 안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엄마와 제 앞에 선지해장국이 놓여졌고 전 집에서 먹는 것처럼 해장국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해장국 속 선지의 맛도 일품입니다.
해장국 속 선지의 맛도 일품입니다. ⓒ 임동현

그런데 식당 안에 있는 아주머니들이 저를 신기하게 쳐다봅니다. 꼬마애가 어떻게 이 국을 맛있게 먹나 하는 눈으로 말이죠.

"아들인가 봐요."
"네, 애가 아파서 학교를 못 갔어요. 그래서 오늘 맛있는 것 좀 먹이려고…."
"아이구, 애가 참 잘 먹네. 아이들이 저렇게 먹는 건 잘 못 본 거 같은데…."

아줌마와 엄마의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저는 한 그릇을 거의 다 먹어갔습니다. 다 먹어갈때쯤 제 귀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정말 잘 먹는다. 멀국(국물)도 하나도 안 남겼네."

"추우니까 해장국 같은 걸로 밥 먹어야 해"

선지해장국은 이렇게 제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또한 비록 직접 만드신 음식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무렵, 엄마가 항상 하시던 잔소리가 있었습니다.

"추우니까 설렁탕이나 해장국 같은 걸로 밥 먹어야 해. 알았지?"

 맛있는 해장국에 대한 예의.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은 빈 그릇입니다.
맛있는 해장국에 대한 예의.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은 빈 그릇입니다. ⓒ 임동현

세월이 흐르고, 거리낌없이 해장국에 소주를 마셔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해장국을 보면 추운 날엔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멀국'까지 싹 비운 빈 그릇. 말로 하지 않아도 방금 먹은 해장국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바로 국물 한 방울 없는 빈 그릇입니다. 그 맛에 절로 다시 힘을 얻게 됩니다. 엄마의 목소리로, 해장국 주인의 인심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힐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선지해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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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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